[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64] 유목민이 왜 성(城)을 쌓았나? ②

2017-10-09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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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성을 쌓고 궁궐 지은 유목민
언제나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고 머물고 싶으면 머물 수 있었던 것이 유목민들이다. 그러한 유목민들이 성을 쌓고 집을 지었다. 여전히 절대 다수의 유목민들이 전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넓은 세계를 소유하고 다스리게 된 몽골제국의 지도부에게는 이 같은 변화를 선택해야할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사진 = 카라코룸 외부 성곽]

카라코룸이라는 정착도시를 건설하게 된 변화는 이제 몽골이 가축이나 키우며 옮겨 다니는 유목민만의 나라가 아니라 정주민들의 세계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이 됐다는 것을 말해준다. 상황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정주민 세계와의 접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대표적 상징물로 등장한 것이 카라코룸이 아니었을까?

▶익숙하지 않았던 정착민 울타리
필요에 의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성도 집도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담을 쌓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느끼는 답답함은 넓은 자연 속을 마음껏 누비고 다니던 야생동물이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혔을 때 느끼는 그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사진 = 이동식 게르(오르도)]

그런 이유 때문인지 오고타이는 카라코룸 성 주변에 게르(이동식 천막)촌을 만들고 그 곳에 설치된 대칸의 게르인 오르도(이동식 궁정)에서 지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후 대칸으로서 카라코룸을 차지했던 구육이나 뭉케도 그렇게 생활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 몽골 초원의 게르]

심지어는 지금의 북경에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를 건설했던 쿠빌라이 대칸도 대도성 한쪽 부분에 게르를 지어 놓고 그 속에서 지나는 날이 많았다.
1246년 카라코룸을 방문해 대칸 구육을 만났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카르피니나 1254년 대칸 뭉케를 만났던 루브르크 모두 오르도에서 대칸을 만났다고 기록해 놓은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제국 지배의 중심지

[사진 = 카라코룸 옛 성터]

그러나 대칸의 호불호(好不好)에 관계없이 카라코룸은 대몽골 제국을 지배하는 중심지가 됐다. 성을 새로 쌓고 도시를 만든 것처럼 제국 지배를 위한 재무․행정체계도 새로 갖춰졌다. 행정체계를 움직이는 일은 몽골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업무는 주로 점령지에서 편입된 유능한 외국인들에게 맡겨졌다. 몽골인들은 이러한 행정과 재무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을 모두 ‘비칙치’라고 불렀다.
 

[사진 = 이흐 몽골산 일대 ]

서기(書記)라는 의미의 이 명칭은 말 그대로 '기록을 맡아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때의 행정조직을 굳이 지금의 말로 바꾸자면 서기국이라는 말이 합당하지 않을까? 이 서기국의 수반은 위구르 출신의 칭카이였다. 그 아래 거란족 출신 야율초재를 비롯한 외국 출신 관료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다. 대칸이 내리는 각종 지시와 명령은 이곳에서 문서화돼 제국 각지로 보내졌다.

▶서기국을 최고 권력 기구로 부상시킨 스탈린
서기국이라는 기구는 별로 낯설지 않다. 20세기 세계 두 중심 축 가운데 하나였던 공산체제를 선택한 나라의 막강한 권력기구로 인식돼 있는 것이 서기국이다. 레닌이 사회주의 혁명 후 볼셰비키 정권을 수립했을 때만해도 공산당 내 서기국은 그렇게 막강한 권력기구는 아니었다. 최고의 권력자인 레닌은 소브나르콤, 즉 내각을 말하는 인민위원들의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수상(首相)의 역할을 맡았다.
 

[사진 = 스탈린 접시 초상화]

당시 민족 인민위원, 즉 민족장관이었던 스탈린이 초대 서기장으로 취임하고 레닌이 죽은 뒤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서기국의 위상은 높아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죽을 때까지 서기장이라는 직함으로 사실상 국가원수로서 권력을 휘둘렀다. 자연히 그가 장악하고 있는 서기국은 막강한 권력기구가 될 수밖에 없었고 종주국인 소련의 예를 따라 모든 공산주의 국가의 최고 권력자는 서기장 또는 제1서기라는 직함을 지니게 됐다. 기록이나 담당하는 서기들의 우두머리가 최고 권력자가 된 연유는 이렇다.

▶몽골제국 서기국-권한 미미한 행정 실무기구

[사진 = 초원의 전신주(카라코룸 가는 길) ]

그렇다면 몽골 제국의 서기국 역시 공산당의 서기국처럼 막강한 권한과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몽골 제국의 지도부가 주로 외국인 출신들로 이루어진 이 기구에 그렇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가능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실권을 가진 몽골인들은 이들 비칙치들을 고용인으로 삼아 새로운 행정 체계를 세우고 문서와 장부를 정리하는 일에 활용했을 것이다. 다만 어떤 칙령도 칭카이가 위구르어로 한 줄 적지 않으면 공포될 수 없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칭카이는 서기국 수반으로서 상당한 권한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 통치 재정․행정제도 도입

[사진 = 카라코룸 가는 길 휴게소]

이 서기국 속에서 야율초재와 같은 유능한 인물은 행정제도를 정비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특히 중국식 제도를 활용한 조세제도를 정비함으로써 제국을 다스리는 데 가장 중요한 재화를 세금을 통해 거둬들일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약탈이 아닌 방법을 통해 고정적으로 세수(稅收)를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사진 = 철조망 처진 옛 카라코룸 터]

통치는 물론 세금 확보를 위해서라도 각지에서 카라코룸으로 통하는 역참(驛站)을 보다 효율적으로 정비했다. 역참과 통치지역 등 곳곳에 곡물창고도 설치됐다. 카라코룸은 이제 제국 곳곳으로 통하는 통치의 중심지이자 세계로 연결되는 국제도시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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