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으로 인해 중국 한인촌과 교민 사회가 몰락하고 있다는 언론 기사가 많아지고 있다.
중국 한인촌의 음식점, 중소기업, 대기업은 물론 그 교민 사회도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다수 교민들은 동의할 것 같지 않다. 중국 한인촌이 그 교민 사회를 대표하지 못한지는 이미 오래됐고, 교민 사회는 나름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저임금 노동력과 조선족 보조를 기대하며 중국으로 건너갔다.
수도 베이징(北京)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선양(瀋陽)과 칭다오(靑島) 등 산둥(山東)성 이북의 상대적 낙후 지역으로 이주했다.
저렴한 주거비 덕분에 199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밀집형 한인촌이 형성됐고, 그 주변에는 한국인의 생활 전반을 뒷받침하는 조선족 집거지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국인이 누렸던 이 같은 편리함은 현지화 욕구를 저하시켰고, 2006년 중국이 양적 성장전략에서 질적 성장전략으로 전환하면서 엄청난 불편함으로 되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발발하자 한인촌을 지탱하던 자본·사람은 중국(인)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2006년 시작된 중국 진출 2기는 장쑤(江蘇)성 이남에 집중됐고, 그 중심 도시로서 상하이(上海)가 부상했다. 상하이가 글로벌 도시로 성장하던 시기 형성된 훙취안루(虹泉路) 한인촌 및 상하이 곳곳에 집거지를 형성한 교민 사회는 21세기 한·중 사회경제 교류 흐름에 잘 적응해왔고 대응력도 키워왔다.
상하이는 1920년대 이미 세계 5대 도시로서 ‘동양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발전했었다. 상하이인의 콧대가 높아져 가면서 외지인을 배척하는 사회경제적 장벽도 두터워졌다.
사회주의 시기 침체됐던 상하이는 1990년대 푸둥(浦東) 개발 이후 옛 명성은 물론 ‘오명’도 함께 회복했다. 비싼 주거생활비로 한국인의 유입도 많지 않았기에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한인촌이라고 내세울 만한 ‘특정 공간’이 형성되지 못했다.
교민들의 주거 공간은 주재원, 자영업자, 노동자, 학생 등 사회경제적 차이에 따라 지리적으로 차등화됐고, 2008년 이후 교민 사회의 분화는 이미 심화되고 있었다.
교민 사회의 분화 단계를 되짚어 보자면 첫째, 1990년대 한국 대기업 주재원들은 구베이(古北) 지역에 자리잡았다.
개혁·개방 이후 구베이는 ‘작은 유엔’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이미 초국적 마을을 구성했던 곳이었기에 주요 생활 반경도 프랑스 대형 마트 까르푸와 스타벅스를 중심으로 구획됐다.
둘째, 2003년 허허벌판과도 같았던 훙취안루에 분양가 5000만원 내외(30평대 기준)의 진슈장난(锦绣江南) 아파트가 신축되자, 많은 한국인들이 ‘내집 마련’을 위해 모여들었고 한국인 식당, 학원, 쇼핑센터, 커피숍 등도 잇따라 생겨났다.
2006년 개점한 천사마트(한인 슈퍼마켓)로 인해 상하이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국인들도 굳이 멀리 떨어진 훙취안루에 가서 ‘장을 보고 싶은 꿈’을 갖게 됐다. 이렇게 훙취안루는 상하이 ‘한인촌’으로 인정받게 된다.
셋째,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교민 사회는 경제적 여건 및 현지화 역량을 동시에 고려하며 훙취안루 인근을 벗어났다. 이들은 주팅(九亭), 난샹(南翔), 쑹장(松江) 등 상하이 서부 외곽 지역으로 이주하며 소규모 집거지들을 만들고 있다.
사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훙취안루 한인촌이 크게 발전했지만, 이는 오히려 상하이 교민 사회가 한인촌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훙취안루 한인촌 발전은 상하이 부동산 활황과 맞물렸다.
당시 상하이 부동산 시장은 용광로와도 같았다. 원칙적으로 외국인은 1채만 소유할 수 있었으나, ‘위에는 정책, 아래에는 대책(上有政策, 下有對策)’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몇 채라도 구매할 수 있었다.
돈 벼락을 맞은 한인촌은 불과 몇 백 미터에 불과한 좁은 생활공간 주변에 새롭게 생긴 유흥업소들과 동거하게 됐고, 일부 교민들과 한국에서 온 출장자들이 밝힌 ‘밤 문화’의 그늘은 대낮의 한인촌에도 짙게 드리워졌다.
상하이 한국인들은 2009년 이후 교민 사회가 많이 성숙했다고 말을 한다. 훙취안루 한인촌의 유흥 문화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훙취안루 한인촌 자체와의 ‘거리두기’도 일반화됐다.
2009년 이후 훙취안루 한인촌의 주거생활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그 정체성도 빠르게 퇴색했다. 교민 사회의 씀씀이는 줄었지만, 한류 영향으로 중국인 소비자가 훙취안루 한인촌 상가를 지탱하기 시작했다.
상가 임대료는 계속 치솟았고 2014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이후 절정을 맞이했다. 조선족들은 자금동원력을 바탕으로 훙취안루 한인촌 상가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훙취안루 한인촌 ‘상징’이었던 천사마트의 부도였다. 지난 7월 부도 규모만 66억원에 이르렀다. 재중 한인촌을 대표하는 ‘대형마트 체인’까지 무너진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베이징의 한국인 수는 크게 감소했지만, 상하이 한국인 수는 오히려 점진적으로 증가해왔다. 비공식 통계이긴 하지만 현재 상하이 한국인 수는 7만명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훙취안루 한인촌의 퇴색에도 불구하고 상하이 교민 사회는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사드 영향이 ‘일상생활’에 거의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다수 상하이 교민들에게 ‘그래도 당신들 힘든 부분이 있지 않냐’라며 굳이 혼란을 조장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한·중 관계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교민 사회가 어떻게 자생력을 강화하며 중국 사회 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관찰할 때다.
중국 한인촌의 음식점, 중소기업, 대기업은 물론 그 교민 사회도 심각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다수 교민들은 동의할 것 같지 않다. 중국 한인촌이 그 교민 사회를 대표하지 못한지는 이미 오래됐고, 교민 사회는 나름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많은 한국인들이 저임금 노동력과 조선족 보조를 기대하며 중국으로 건너갔다.
수도 베이징(北京)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선양(瀋陽)과 칭다오(靑島) 등 산둥(山東)성 이북의 상대적 낙후 지역으로 이주했다.
저렴한 주거비 덕분에 1990년대 후반부터 대규모 밀집형 한인촌이 형성됐고, 그 주변에는 한국인의 생활 전반을 뒷받침하는 조선족 집거지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한국인이 누렸던 이 같은 편리함은 현지화 욕구를 저하시켰고, 2006년 중국이 양적 성장전략에서 질적 성장전략으로 전환하면서 엄청난 불편함으로 되돌아왔다. 설상가상으로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가 발발하자 한인촌을 지탱하던 자본·사람은 중국(인)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2006년 시작된 중국 진출 2기는 장쑤(江蘇)성 이남에 집중됐고, 그 중심 도시로서 상하이(上海)가 부상했다. 상하이가 글로벌 도시로 성장하던 시기 형성된 훙취안루(虹泉路) 한인촌 및 상하이 곳곳에 집거지를 형성한 교민 사회는 21세기 한·중 사회경제 교류 흐름에 잘 적응해왔고 대응력도 키워왔다.
상하이는 1920년대 이미 세계 5대 도시로서 ‘동양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발전했었다. 상하이인의 콧대가 높아져 가면서 외지인을 배척하는 사회경제적 장벽도 두터워졌다.
사회주의 시기 침체됐던 상하이는 1990년대 푸둥(浦東) 개발 이후 옛 명성은 물론 ‘오명’도 함께 회복했다. 비싼 주거생활비로 한국인의 유입도 많지 않았기에 2000년대 초반까지는 한인촌이라고 내세울 만한 ‘특정 공간’이 형성되지 못했다.
교민들의 주거 공간은 주재원, 자영업자, 노동자, 학생 등 사회경제적 차이에 따라 지리적으로 차등화됐고, 2008년 이후 교민 사회의 분화는 이미 심화되고 있었다.
교민 사회의 분화 단계를 되짚어 보자면 첫째, 1990년대 한국 대기업 주재원들은 구베이(古北) 지역에 자리잡았다.
개혁·개방 이후 구베이는 ‘작은 유엔’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이 이미 초국적 마을을 구성했던 곳이었기에 주요 생활 반경도 프랑스 대형 마트 까르푸와 스타벅스를 중심으로 구획됐다.
둘째, 2003년 허허벌판과도 같았던 훙취안루에 분양가 5000만원 내외(30평대 기준)의 진슈장난(锦绣江南) 아파트가 신축되자, 많은 한국인들이 ‘내집 마련’을 위해 모여들었고 한국인 식당, 학원, 쇼핑센터, 커피숍 등도 잇따라 생겨났다.
2006년 개점한 천사마트(한인 슈퍼마켓)로 인해 상하이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한국인들도 굳이 멀리 떨어진 훙취안루에 가서 ‘장을 보고 싶은 꿈’을 갖게 됐다. 이렇게 훙취안루는 상하이 ‘한인촌’으로 인정받게 된다.
셋째,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교민 사회는 경제적 여건 및 현지화 역량을 동시에 고려하며 훙취안루 인근을 벗어났다. 이들은 주팅(九亭), 난샹(南翔), 쑹장(松江) 등 상하이 서부 외곽 지역으로 이주하며 소규모 집거지들을 만들고 있다.
사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훙취안루 한인촌이 크게 발전했지만, 이는 오히려 상하이 교민 사회가 한인촌을 부정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훙취안루 한인촌 발전은 상하이 부동산 활황과 맞물렸다.
당시 상하이 부동산 시장은 용광로와도 같았다. 원칙적으로 외국인은 1채만 소유할 수 있었으나, ‘위에는 정책, 아래에는 대책(上有政策, 下有對策)’이라는 유명한 말처럼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몇 채라도 구매할 수 있었다.
돈 벼락을 맞은 한인촌은 불과 몇 백 미터에 불과한 좁은 생활공간 주변에 새롭게 생긴 유흥업소들과 동거하게 됐고, 일부 교민들과 한국에서 온 출장자들이 밝힌 ‘밤 문화’의 그늘은 대낮의 한인촌에도 짙게 드리워졌다.
상하이 한국인들은 2009년 이후 교민 사회가 많이 성숙했다고 말을 한다. 훙취안루 한인촌의 유흥 문화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훙취안루 한인촌 자체와의 ‘거리두기’도 일반화됐다.
2009년 이후 훙취안루 한인촌의 주거생활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그 정체성도 빠르게 퇴색했다. 교민 사회의 씀씀이는 줄었지만, 한류 영향으로 중국인 소비자가 훙취안루 한인촌 상가를 지탱하기 시작했다.
상가 임대료는 계속 치솟았고 2014년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이후 절정을 맞이했다. 조선족들은 자금동원력을 바탕으로 훙취안루 한인촌 상가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충격적인 사건은 바로 훙취안루 한인촌 ‘상징’이었던 천사마트의 부도였다. 지난 7월 부도 규모만 66억원에 이르렀다. 재중 한인촌을 대표하는 ‘대형마트 체인’까지 무너진 것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베이징의 한국인 수는 크게 감소했지만, 상하이 한국인 수는 오히려 점진적으로 증가해왔다. 비공식 통계이긴 하지만 현재 상하이 한국인 수는 7만명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훙취안루 한인촌의 퇴색에도 불구하고 상하이 교민 사회는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사드 영향이 ‘일상생활’에 거의 미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다수 상하이 교민들에게 ‘그래도 당신들 힘든 부분이 있지 않냐’라며 굳이 혼란을 조장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한·중 관계의 악화에도 불구하고 교민 사회가 어떻게 자생력을 강화하며 중국 사회 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관찰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