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만에 최악의 홍수를 몰고 온" 허리케인 하비가 미국의 석유·가스 시설이 집중된 미국 멕시코만 연안을 강타하면서 미국 에너지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피해 지역에 몰려있던 송유관과 정유시설이 잇따라 폐쇄되면서 연료 가격이 들썩거리는가 하면 미국 정부는 연료 부족을 막기 위해 5년 만에 처음으로 비축유 방출에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즈(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국의 정유시설 중 20~30% 가량이 하비로 인해 가동을 멈췄다. 항만 등 기간시설이 폭우와 침수 피해를 입으면서 정상 가동 중인 정유시설로 원유를 수송하는 작업에도 차질이 생겼다.
휴스턴에서 시카고까지 연료를 수송하는 익스플로러 파이프라인도 정유시설 침수로 인해 가동이 중단됐다. 일일 60만3000배럴의 원유를 처리하는 모티바 정유시설 역시 2주 가량 폐쇄될 예정이라고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상황이 이렇자 연료 공급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휘발유 도매가는 31일 하루 동안 13.5%나 폭등했다. 갤런당 2.14달러로 하비 피해를 입기 전에 비해 30% 이상 뛰었다. 휘발유 소매가격 역시 갤런당 2.49달러로 한 주 전에 비해 14센트나 올랐다. 일부 전문가들은 열흘 안에 가격이 2.60~2.75달러까지 오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연료 부족에 대한 공포 속에서 기현상도 포착됐다. 보통 미국에서 연료는 남부에서 동부로 이동하지만 이번에는 뉴욕항에서 휘발유를 가득 실은 배들이 남쪽 조지아나 플로리다로 향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결국 미국 에너지 당국은 전략비축유(SPR) 중 원유 100만 배럴을 루이지애나 소재 정유시설로 방출키로 했다. 미국은 1970년 중동발 석유파동 이후 원유를 비축하기 시작했는데 당국이 비축유를 방출하는 것은 2012년 이후 처음이다.
국제유가의 경우 하비로 인해 하방 압력을 받고 있다. 미국의 정유시설 폐쇄로 인해 원유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국제유가는 31일 반발매수로 3% 가까이 올랐으나 하루만에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1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10월 인도분은 전날보다 1% 가량 떨어졌다.
하비의 여파는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최근 세계가 미국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던 터라 그 여파는 전 세계로 미치고 있다. FT에 따르면 미국에서 일일 100만 배럴의 휘발유·경유를 수입하는 중남미는 공급 차질을 우려해 부랴부랴 다른 수입원을 찾고 있다.
미국에서 LPG를 수입하는 아시아도 직격탄을 맞았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동북아시아는 미국의 LPG 수출 물량 중 절반 가량을 수입하는데, 물량 중 90%가 멕시코만에서 출발한다. 하비로 인해 멕시코만 항만이 폐쇄된 영향에 31일 동북아 시장에서 프로판 9월물 스와프는 10월물 대비 톤당 8.5달러의 프리미엄이 붙었다. 불과 한 주 전 톤당 1달러 디스카운트에서 역전된 것이다. 텍사스를 대체할 수입원으로 떠오른 중동 LPG 공급업체들은 일제히 프로판과 부탄 9월물 가격을 톤당 40~60달러 올렸다.
다만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의 정유업체들이 하비로 휘청이는 동안 아시아 경쟁업체들에겐 기회가 찾아왔다고 전했다. 아시아 정유업체들이 두바이 원유를 정제해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닷새만에 배럴당 6.50달러에서 배럴당 9.06달러까지 불어났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