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8년, 금나라의 여섯 번째 황제인 장종이 죽고 위소왕(衛紹王) 영제(永濟)가 그 뒤를 이어 즉위했다.
"영제 같은 어리석은 자에게 옥좌가 가당키나 한가? 그런 자에게 어떻게 나 자신을 낮춘다는 말인가?"
▶ 對金전쟁 선포
"오, 영원한 하늘이시어! 저는 금나라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한 선조들의 피를 갚기 위해 칼을 잡았습니다. 제가하는 일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도움의 팔을 내게 벌려주십시오!"
금나라와의 전쟁을 민족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보복 전쟁으로 이끌어 가자 병사들의 전의는 더욱 불타올랐다.
▶ 거란족 몰아내고 여진족이 세운 金
금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나라다. 발해가 망한 2년 뒤인 1,115년 북만주 하얼빈 남동쪽의 완안부 추장 아골타(阿骨打)가 당시 그 지역을 지배하던 거란족의 요(遼)나라에 반기를 들고 제위에 올라 국호를 금이라 칭하면서 나라를 세웠다.
나라이름을 금이라 칭한 것은 첫 도읍지 근처 지역에서 금이 많이 생산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졌다.
태조가 된 아골타는 1,120년 송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나라를 만주 땅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때 밀려난 거란족의 요나라는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진출해 카라 키타이, 즉 서요(西遼)를 세우게 된다.
금 태조는 이후 서남쪽으로 세력을 넓혀가면서 대동大同)과 연경(燕京:지금의 북경)을 손에 넣었다.
▶ 宋 밀어내고 長江 이북 장악
자연히 중국 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송나라와 불화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2대 태종 때인 1127년 마침내 송나라를 장강(長江:양자강)남쪽으로 밀어내고 화북과 내몽골 지역에 걸친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됐다.
금나라는 4대 해릉왕 때인 1,153년 수도를 만주에서 연경으로 옮겨 중도라고 칭하면서 만주의 여진족들을 대거 지금의 베이징 근처지역으로 이주 시켰다.
이때가 테무진이 태어나기 바로 직전으로 아버지 예수게이가 금의 지원을 받았던 타타르족과 크고 작은 전투들을 벌이고 있을 시기였다.
사촌인 희종을 살해하고 황제에 오른 해릉왕은 남송을 장악하기 위해 무리하게 남벌(南伐)을 시도했으나 거란인의 반란이 일어나는 등 동요가 계속되는 가운데 제위에서 밀려났다.
▶ 내리막길의 금나라 적기(適期) 공략
이 시기는 몽골의 통일전쟁이 시작되는 시기로 푸른 호수에서 테무진이 처음으로 칸의 자리에 오르는 시기에 세종의 치세가 끝나게 된다.
여섯 번째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장종 때부터 금나라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황하가 범람한 뒤 치수공사에 막대한 국비를 쏟아 넣은 데다 몽골에 대한 무리한 원정을 하면서 재정난을 불러왔다.
위소왕은 무능한데다 권위도 위신도 없는 심약한 자였고 그 점이 칭기스칸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 첫 4년 전투에서 판가름 난 전쟁
1211년 5월, 드디어 푸른 군대는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서하를 거쳐 동쪽으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이 때 시작된 금나라와의 전쟁은 칭기스칸이 죽은 후 2대 대칸 오고타이가 금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킬 때까지 25년간 계속된다.
그러나 첫 4년 동안의 전쟁에서 승부는 이미 판가름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1211년 첫해, 금나라 변방은 쉽게 무너졌다. 직접 전투에 앞장선 칭기스칸은 내몽골로 들어가는 대청산(大靑山)을 넘어 무주(武州)를 취했다.
다시 내몽골 고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고개인 야호령(野狐領)을 넘은 칭기스칸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이 없이 금나라의 수도 중도(中都;지금의 북경 근처)쪽으로 접근해 가고 있었다.
▶ 무너진 오사보, 군목감 장악
1211년 8월, 만리장성 앞에 버티고 있던 변방의 요새 오사보(烏沙堡)가 무너졌다.
1211년 10월, 푸른 군대는 지금 내몽골지치구의 구도인 후흐호트 서쪽 초원에 있던 금황제의 군목감(軍牧監)을 습격했다.
▶ 거용관 함락시킨 후 초원으로
사전에 거용관 내부의 움직임을 탐지한 제베가 금나라 군사를 밖으로 유인해 격파하는 동안 칭기스칸은 거용관의 정예병을 일거에 제압했다.
그러나 금나라의 수도 중도를 눈앞에 두고 푸른 군대는 말머리를 몽골 고원 쪽으로 돌렸다. 겨울이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칭기스칸은 말과 병사가 지쳐 있는 데다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기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미 점령한 지역도 그대로 버려두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정복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데도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