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예술은 ‘기본’과 ‘대중’으로 회귀해야 한다

2017-08-31 14:47
  • 글자크기 설정
주샤오항(朱晓航), 자는 정현(净贤), 저장(浙江)성 진화(金華) 출신, 칭하이(靑海)성 저장상회 사무장 역임. 헌재 베이징 절회연합투자관리 유한공사 이사장, 칭하이성 중산문화예술원 이사, 베이징 한문성당서화원 이사, 중국 서화예술연구원 연구원

인민화보 리후이펑(李慧鹏) 기자=어려서부터 심취한 서예를 20년 넘게 배우고 있는 주샤오항.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두터우면서도 균형감 있는 필체, 매끄러운 필치와 시원시원한 구도로 대가의 풍모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를 소개한다.
 

주샤오항 [사진=인민화보 천젠 ( 陈建) 기자 ]

선(禪) [사진=인민화보 천젠 기자 ]


안(內)에서 밖(外)으로의 예술
주샤오항은 조상 중에 한림원 학사가 두 명이나 있을 정도로 인재가 많은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군인이 되었다가 교편을 잡았고, 이후 수십 년 간 꾸준히 글을 썼다. 의사였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조부의 엄격한 교육과 보살핌 속에서 자랐는데, 어머니는 어렸을 때 틈만 나면 조부께서 종이와 먹을 준비해 놓고 서예를 연습시켰다는 얘기를 자주 해 주셨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주샤오항은 여섯살 때부터 10 년을 매일같이 안진경(颜真卿), 류공권(柳公权), 미불(米芾), 왕희지(王羲之) 등 대가의 글씨를 따라 썼고, 대전(大篆)체와 위비(魏碑) 등의 서체를 공부했다. 후에 교사가 되고 나서도, 이후 공무원이 된 후에도 그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국 탄탄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주샤오항의 고향은 강남(江南)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저장성 금화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많은 명인들을 배출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강남 문인들의 기질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강남 문인들의 방식을 고수하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예술이 어떤 틀에 얽매여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낭만과 수려함을 쫓는 강남 서풍 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예술 형식을 추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수년 동안 여러 지역을 다니던 그는 마침내 중국 서북지역인 칭하이에서 영감을 얻었다. 자갈, 초원, 사막 그리고 호방한 서북지역의 풍습, 여기에 대범하면서 자유롭고 외향적인 기질이 있는 그 곳에서 바로 자신이 찾던 영감을 발견한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 <칠률(七律), 동운(冬雲)>[사진=인민화보 천젠 기자 ]


우연히 맺은 사제의 인연
주샤오항은 칭하이에 머무르며 저장상회의 사무장을 지냈는데, 그런 와중에도 예술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10년 동안 칭하이 곳곳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서체는 마음의 변화에 따라 해서체에서 호방한 느낌의 행서체로 옮겨 갔다.
특히 우연한 기회에 당대 곤륜파 서예 창시자이자 중국 서예가문 보씨서법(保氏书法) 3대 전수자인 바오궈안(保国安)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주샤오항의 수준은 질적인 발전을 이뤘다.
2012년, 그는 베이징에서 친구와 함께 바오궈안 선생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바오 선생도 칭하이 출신이고 주샤오항 자신도 칭하이에서 10년을 살았지만 그의 명성만 들었지 직접 본 적은 없던 터였다.
당시 공교롭게도 바오 선생에게 갑작스레 일이 생겨 언제 작업실로 돌아올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한참을 기다리다 지루해진 주샤오향은 작업실에 있던 문방사우를 발견하고 붓을 들어 바로 몇 줄을 써 내려갔다.
한참 후 돌아온 바오 선생이 글씨를 보고 “작업실에 누가 다녀갔는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글씨로구나, 정말 깊이가 있다!” 라고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은 주샤오항이 쓴 것이라고 대답했고, 바오 선생은 의아해하며 “정말 당신이 썼습니까?”라고 물었다. 주샤오항이 “그렇습니다”라고 답하자 바오 선생은 “보통 내공이 아닙니다. 왜 서예를 계속 하지 않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주샤오항은 사실 서예에서 손을 놓지 않고 꾸준히 연마해 왔지만 정식으로 스승을 모신 적이 없었다.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글씨를 연습하고 대가의 서체를 따라 쓰면서 전통을 토대로 한 창조를 추구하다 보니 인기를 쫓아가는 식의 ‘일그러진 창조’나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아직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예술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때 주샤오항은 그냥 친구를 따라간 것일 뿐 자신의 스승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주샤오항은 자연스러우면서 참신하고 대범한 필체, 전체적으로 기백이 넘쳐 흐르지만 세밀한 곳까지 놓치지 않는 바오 선생의 예술을 존경해 왔다. 바오 선생의 필법, 자형, 묵의 색깔, 행(行)의 기운, 구도는 모두 조화를 이룬다. 카리스마 있는 붓 터치와 운치가 깃든 글자에서부터 힘이 있는 행(行), 안정감 있는 구도, 기운이 넘치는 묵(墨)까지 그의 서예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트이게하면서 그 예술에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바로 주샤오항이 찾아 헤매던 예술 스타일과 맞아 떨어졌다.
바오 선생의 물음에 주샤오항은 이때다 싶어 “가르침을 받을 스승을 만나지 못해서 입니다, 선생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저를 서예 예술의 길로 이끌어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그 후 바오궈안과 주샤오항은 칭하이에서 정식으로 사사의 예를 올리고 사제의 연을 맺었다.
 

정(靜) [사진=인민화보 천젠 기자 ]

청우(聽雨) [사진=인민화보 천젠 기자 ]

무동건곤(武動乾坤)[사진=본인 제공]


예술은 탐미하는 것, 그러나 모두의 것
주샤오항은 수년간의 노력과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서예 예술은 전통을 이어받아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러한 전통 속에서 개인의 개성을 담은 서예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한 창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서예 예술을 탐미와 대중, 두 가지로 결론 지었다. 수천 년을 이어내려 온 중국의 서예 역사는 풍성한 예술적 자산을 후대에 물려주었다. 서예 명인의 작품을 보면 눈과 마음이 즐거워지는 미감을 담고 있는 한편 예술가 개인의 재능과 스타일이 한껏 드러난다.
지금의 서예 예술은 어지럽거나 이상하게 쓰는 서체가 유행하면서 사람들은 서예의 독특한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단지 ‘대가’라고 불리는 소수만이 서로를 치켜세워 주거나 이를 스스로 ‘창조’라고 부르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이러다가는 시대의 급류에 휩쓸려 사라질지도 모른다.
역사적으로 서예 작품은 높은 신분과 명성을 가진 자들에 의해 독점되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가 흐르며 물질문명과 함께 정신문명도 끊임없이 발전하였다. 근현대 서화(書畵)시장에 과열 현상이 나타나긴 했지만 국가가 정책적 조정에 나섰고 이에따라 이성을 되찾고 있다. 또한 대중문화에 대한 국민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서예 예술이 대중화되고 있다. “앞으로 서예 예술이 발전하려면 더 많은 사람의 관심이 필요하고 그래야만 더욱 빛을 낼 수 있다”고 주샤오향은 말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
언어선택
  • 중국어
  • 영어
  • 일본어
  • 베트남어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