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그래그래] 굳세어라 삼세끼

2017-08-1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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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최보기]


[최보기의 그래그래]
북칼럼니스트 · 작가

굳세어라 삼세끼

나는 50대 중반 맞벌이 남편이다. 아내나 나나 젊었을 때와 달리 직장과 가사의 병행이 힘에 부친다. 그렇다고 성년이 된 자식들이 부모 처지 이해해 나서서 가사일을 도와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뒷손 가는 일만 더 벌이고 다닌다. 이번 주에만 다섯 번을 부딪쳤다.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볼 틈이 없다.

아내는 유통기한이 지났다며 냉장고의 건강음료를 버리려 했다. 나는 공기가 통하지 않게 밀폐됐고, 냉장보관 했으니 먹어도 된다고 했다. 아내는 그러다 식중독 나면 몇 푼 아끼려다 병원신세 진다고 했다. 나는 유통기한과 유효기간, 소비기한의 차이를 주장하며 버릴 필요 없다고 했다. 아내는 먹고 죽든지 살든지 알아서 하되 냉장고에 다신 넣지 말라고 했다. 나는 이렇게 안 먹고 버릴 거면 건강음료 구매량을 줄이라 했고, 아내는 왜 바쁜 아침부터 시비냐고 맞받았다. 결국 그 건강음료는 나도 마시기가 거시기해 버렸다.

베란다에 널어둔 빨래가 갑자기 쏟아진 비로 습기를 먹었다. 아내는 비가 오면 베란다 창문을 닫아야지 뭐하고 있냐고 했다. 나는 그놈의 비가 온다고 말하고 오냐, 비 개면 다시 마를 것이라 했다. 아내는 중간에 습기를 먹으면 냄새가 나 빨래를 다시 해야 하는데 당신이 할거냐 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 소리쳤더니 빨래를 거실 건조대로 옮기고 에어컨과 선풍기를 돌리라 했다. 속으로 부아가 났지만 다투기 싫어 시키는 대로 했다.

뒷베란다에는 쓰레기 봉지가 셋 있다. 음식물, 재활용, 일반 쓰레기. 이것들의 처리 역시 내 차지다. 오래 전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갔던 아내가 갑자기 튀어나온 고양이 때문에 식겁한 후 그리 됐다. 일반쓰레기 봉지에 아내가 김치 꺼내며 썼던 일회용 비닐장갑이 들어있었다. 나는 비닐은 재활용 봉지에 넣으라 했고, 아내는 그런 작은 비닐까지 간섭하니 쓰레기 버릴 때마다 스트레스 받는다고 했다. 나는 그러니까 버릴 때 좀 제대로 버려라, 옛날 엄마들은 비닐장갑 없이도 요리만 잘하시더라, 김치 꺼낸다고 비닐장갑, 나물 무친다고 또 비닐장갑, 한 장이면 될 걸 서너 장 쓰는 것도 문제다, 환경 좀 생각하며 살자고 했다. 아내는 지지리도 못살던 구석기 시대 이야기 하지 말아라, 환경 걱정 하기 전에 아직도 직장 나가야 하는 당신 각시 걱정이나 하라고 했다. 나는 할말이 없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시장에 간 아내가 잘 쓰고 있던 후라이팬과 양은냄비를 새로 사왔다. 말짱한데 왜 새로 샀냐 했더니 칠이 벗겨져 그렇다고 했다. 나는 칠이 벗겨져도 인체에는 아무 영향 없다고 했다. 아내는 칠이 벗겨진 것들은 중금속 덩어리를 먹는 것이라 했다. 나는 솥단지 구멍 날 때까지 썼던 옛날 어른들은 어떻게 살았다냐, 칠 다 벗겨진 중국집 후라이팬은 또 어떻고 하며 에나멜 코팅이나 주석 도금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내는 무식한 소리 하지 말고 인터넷 보라고 했다. 냄비는 구멍 뚫어 화분으로 쓸까 하다 다른 곳에서 유용하게 쓰이겠지 싶어 버렸고, 후라이팬은 집에서 소주 한 잔 하면서 삼겹살이라도 구울 때 써먹으려고 슬쩍 뒷베란다에 감췄다.

늦잠을 즐기는 일요일 오전 식사준비로 아내가 분주하다. 이때는 같이 거들면 좀 수월하므로 옆에서 재료 다듬기, 설거지 등을 맡는다. 쌈 싸먹으려 사다 놓은 배추가 나왔고 감자, 호박, 양파 등 된장국 소재들이 나왔다. 나는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이 배추로 된장국 끓이면 어떠냐 했다. 아내는 쌈 배추는 쌈 싸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배추가 그 배추지 쌈 배추 따로, 김치 배추 따로 있냐고 했다. 아내는 모르면 잠자코 있어라, 뭔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며 호박 된장국을 기어이 끓였다.

의견을 묵살 당해 기분이 상해버린 나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등산 배낭 챙겨 집을 나와버렸다. 막걸리 한 병 마시고 나무 아래 누우니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밖에 나가 돈 벌지, 집안일 뒤치다꺼리 다하지, 종업원도 이런 종업원이 있나, 아니 종업원은 차라리 월급이나 받지, 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송해의 전국노래자랑은 언제부터 시큰둥해졌지? 자연인 프로에 나오는 그들은 어떻게 그런 훌륭한 생각을 했을까? 뭐? 집에서 한 끼 먹으면 일식이, 두 끼 먹으면 이식놈, 세 끼 먹으면 삼세끼? 이거야 원, 남자들이 아내를 놓고 ‘살림 잘 하고 돈까지 잘 버는 황금오리, 돈 많은데 일찍 죽으면 앗싸가오리, 살림도 못 하고 돈도 못 버는 어찌하오리’라 하면 기분 좋겠어? 흥! 내가 더러워 떠나고 만다. 자연인처럼 훌훌 내 길 찾아 떠나고 만다고.

나뭇잎 사이 조각난 하늘 틈새로 영혼은 자유를 찾아 치솟으려 했고, 땅을 디딘 발은 다시 그것을 끌어내리길 반복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아내였다. 저녁에 가족들이랑 장어 먹게 일찍 들오란다. 장어가 지글지글 익는다. 장어를 앞에 두고 소주를 시키지 않는 것은 장어에 대한 예의가 아니나 산에서 이미 막걸리를 마신 처지라 눈치가 보여 머뭇댔다. 아내가 벨을 눌렀다. 여기 소주 한 병이요! 또 장어꼬리가 몸에 좋다며 아이들 못 먹게 죄다 내 앞에 놓는다. 그 꼬리 먹어봐야 가족 간에 어디 쓸 데나 있냐고 하려다 본전도 못 찾겠다 싶어 참았다. 장어꼬리에 소주 한 잔을 넘기며 다짐했다. 언젠가는 나도 깊은 산속 자연인이 되고 말거야. 아무리 불러봐라. 내가 그 산을 나오나. 안 나와, 절대로 안 나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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