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수칼럼] 구축의 시대

2017-08-0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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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손병수]


손병수칼럼
초빙논설위원

구축의 시대

 지난 5월 9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오늘로 석달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이 바뀌고 정부도 바뀌었다. 제도와 정책 역시 무수히 바뀌었다. 인수위를 꾸리지 못하고 출범했지만, 대통령 업무지시나 시행령 개정 등을 통해 평상시라면 정권을 뒤흔들 만한 조치들이 쏟아졌다. 특히 ‘적폐 청산’과 ‘소득주도 성장’을 앞세운 인사와 정책은 80%가 넘는 대통령 지지율에 올라타 질주에 질주를 거듭하고 있다. 새 정부는 문 대통령 스스로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표현했듯, 기존 정책이나 제도를 송두리쩨 뒤바꾸고 있다. 단지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몰아내거나 밀어내 버릴 기세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직후에 발표한 업무지시 1호는 ‘대통령 직속 일자리위원회 설치’였다. 선거 공약인 공공부문 81만개 일자리 창출을 목표로 하는 일자리위원회 설치는 그동안 고용은 민간기업과 시장이 맡는다는 인식과 관행을 밀어내 버렸다. 이후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유도, 최저임금 대폭 인상 등이 이어지며 노동 소득을 늘려 성장 동력으로 삼는다는 새 정부의 지향점을 분명히 했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사 중단과 공론조사 지시 역시 원자력발전에 기본 전력수요(기저부하)를 감당시켜온 기존 정책을 단숨에 밀어내는 조치였다. 그동안 1조6000억원을 들여 공정률 30%에 이른 원전 공사는 중단된 대신 논란은 점점 커지고 있다. 대통령 업무지시 2호로 나온 한국사 국정교과서 폐지는 어떤가. 지난 정권에서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기어이 만들어낸 교과서를 한방에 몰아내 버렸다. 업무지시 7호 4대강 사업 정책 감사 지시와 이어진 수문 개방 등의 조치 역시 21조원이 투입된 국가 프로젝트를 생사의 경계선으로 밀어내고 있다. 6월과 8월, 두 차례 나온 부동산 대책은 강남 아파트를 진원으로 하는 투기적 수요를 밀어내기 위해 일찍이 보지 못한 고강도 대책을 총동원하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적폐 청산을 내세운 검찰, 국정원, 군 등 권력기관들의 구정권 인맥 밀어내기는 전방위로 진행 중이다. 자율형사립고와 특수목적고 등 지난 정권들이 육성해온 고교들도 언제 밀려날지 모를 기로에 서 있다.
문 대통령 휴가 직전에 발표된 국정과제와 증세 계획안은 말하자면 이런 밀어내기 시리즈의 정점이었다. 5년간 178조원을 투입해서 일자리 창출, 복지 확대 등 100대 국정과제를 해결하겠다는 발표에 이어 이른바 초고소득 개인과 법인에 소득세, 법인세를 증세한다는 당정(黨政)의 방침은 곧장 ‘구축(驅逐)효과(Crowding Out)’ 논쟁으로 이어졌다. ‘구축’은 곧 밀어내기, 몰아내기를 뜻한다.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두거나 국채를 발행해서 재정 지출을 늘릴수록 민간이 쓸 돈은 부족해져서 일정 시간이 지나면 민간소비와 투자를 몰아낸다는 이론이다. 보수언론과 우파 경제학자들을 중심으로 새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전략을 비판하는 논리적 근거이기도 하다. 명지대 조동근 교수는 노무현 정부 이후의 통계를 근거로 “정부 지출을 늘리기 위해 조세부담률을 올리면 경제성장률은 하락한다”고 잘라 말한다.
그러나 구축효과가 반드시 경제를 망친다는 주장은 비약이다. 정부가 돈을 풀어 불황을 극복한 사례는 많다. 재벌로 대표되는 민간부문이 주도해서 경제가 성장하면 일반 국민들의 소득과 소비가 늘어난다는 ‘낙수효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의 재정지출 확대 전략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다만 기존 정책을 급히 밀어내려다 보니 증세나 재정지출과 관련한 외국 통계들을 조작한다거나 ‘명예 과세‘, ’존경 과세‘ 같은 말장난으로 진정성을 의심받는 행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실제로 정부가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법인세 증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OECD 통계는 ‘조작’ 의혹을 받을 만했다. 한국의 법인세 최고세율 22%가 OECD 35개국 평균치(22.7%) 수준이라는 통계는 생략한 채 G20(선진 20개국) 평균 최고법인세율 24.7%보다 낮다는 수치만 강조했으니 말이다.
경제학 교과서에는 ‘구축’이라는 단어가 또 하나 등장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Gresham)의 법칙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드라이브를 지켜보는 심정이 조마조마한 것은 바로 이런 구축의 우려 때문이다. 기존 정책과 제도를 악화로 간주하고 한사코 몰아낸다면 새 정부의 대안은 양화가 확실한 것인가. 원전이 악화라면 태양열이나 풍력 같은 신재생 에너지는 양화인가. 4대강사업이 악화라면 수자원 보전을 위한 이 정부의 양화는 무엇인가. 민간부문의 지지부진한 일자리 창출이 악화라면 세금으로 만드는 공공부문 일자리는 양화인가. 오히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지는 않을 것인가. 그런 우려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밀어내기가 강할수록 저항과 반발도 커진다. 새로운 정책이 실패할 경우의 리스크는 더욱 커진다. 가보지 않은 길을 택한 위험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달이 지난 지금도 문재인 정부의 기세는 거침이 없다. 증세든, 원전 중단이든, 최저임금이든 밀어붙일 기세다. 그것이 정권 교체이기도 하다. 조각과 정부조직 개편이 끝났으니 이제 산하기관에 선거 유공자들을 보내기 위한 인사 밀어내기도 다양하게 진행될 것이다. 바야흐로 구축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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