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색깔 정치
색깔로 덕을 본 게 보수정당이다. 과거 북풍이다, 종북이다 색깔 공세를 펴면 표는 알아서 움직였다. 그러던 보수정당이 2012년에 과감히 변색했다. 민자당 이래 유지해 왔던 파란색을 버렸다. 대신 ‘좌파’ 냄새 풍기는 빨간색을 덧칠했다.
빨강은 피와 열정과 노동을 상징한다. 개혁과 경제민주화를 담은 색이다. 새누리당은 그렇게 색깔을 바꿔 승리했다. ‘레드 콤플렉스’에 빠져 있던 진보정당은 재빨리 파란색으로 변색했다. 하지만 뒷북이었다. 개혁과 경제민주화란 ‘전가의 보도’를 빼앗겼다. 그래서 졌다.
관련기사
색깔 정치의 원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1988년 총선에서 노란 스카프와 목도리를 둘렀다. 노란색은 군부독재의 북풍한설을 참아내는 인동초, 얼음을 뚫는 복수초의 ‘희망‘을 상징했다. 무엇보다 노란색은 그에게 씌워진 ‘빨간 딱지’를 부지불식간에 지워버렸다. 그렇게 총선에서 이겼다. 나중에 대통령도 됐다.
이후 여야를 막론하고 수도 없이 당명이 바뀌었지만, 상징 색깔은 자유한국당 말고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이 노랑+초록+파랑으로 상징색을 정한 것은 역사가 있다. 전신인 새천년민주당은 초록이었고, 이후 딴살림을 차린 열린우리당은 노랑이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민주통합당으로 합쳐지면서 노랑+초록이 됐고, 이후 파랑을 더한 것이다.
과연 이런 색깔은 선거와 어떤 함수관계가 있을까. 지난 ‘장미 대선’에서 어떤 효과를 냈을까. 장미꽃으로 비유해 보자.
먼저 더불어민주당이다. 색깔이 좀 복잡하지만, 그래도 ‘파랑 본색’이다. 파란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그런데 최근 파란색 장미의 재배가 가능해지면서 꽃말에 ‘기적’이 더해졌다. 촛불 혁명에 이은 조기 대선, 여유 있는 승리야말로 파란 장미의 꽃말처럼 기적적이다.
자유한국당은 ‘빨강 변색’이다. 후보의 성도 붉었다. 빨간 장미의 꽃말은 ‘열정’과 ‘열렬한 사랑’이다. 두루 사랑받는 꽃이지만, 그만큼 가시도 많고 날카롭다. 국민의당은 ‘초록 동색’이다. 한데, 녹색은 이파리 몫이다. 녹색 꽃은 드물다. 이파리와 색깔이 같으면, 벌과 나비가 구별하지 못한다. ‘화수분’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바른정당은 ‘하늘 청색’이다. 역시 파랑 계열이어서 ‘불가능’과 ‘기적’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절망과 희망의 동거인 셈이다. 정의당은 ‘노랑 황색’이다. 노란 장미는 ‘질투’와 ‘성취’를 뜻한다. ‘영원한 사랑’이라고도 한다. 누군가의 질투를 받으며, 영원한 사랑을 구하는 숙명일까. 그렇게 장미 대선은 결말이 났다.
사실 장미꽃은 모순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색깔로 사랑을 받는다. 빨간 장미는 빨간색이 싫다. 가시광선 가운데 모든 색을 받아들이고 빨간색만 반사해 버린 이유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장미가 싫어서 버린 빨간색을 바라보며 찬탄한다. 이때 장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위선과 자기기만의 갈림길인가.
마치 빨간색이 본능적으로 싫은 자유한국당이 빨간색을 반사하는 것과 유사한 장면이다. 어쩌면 적폐 청산을 내세운 더불어민주당이 개혁과 열정을 상징하는 빨간 색깔을 흡수하고 차가운 파란색을 내세운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색깔에 선악이 있겠나. 모든 색깔은 같은 이유로 제각각 아름답다. 그래서 독립적으로 선연히 빛날 때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래야 한데 모여 아름다운 꽃밭이 된다. 모든 장미가 무지개 색이라면, 너무 진부하다.
다른 색을 탐내면 자신의 색깔을 잃는다. 이런저런 색깔을 모두 섞으면 어둠침침한 검정색이 되는 것이다.
장미꽃이 진다. 열흘 붉은 꽃은 없다지만, 시드는 장미는 아름다웠던 만큼 안타깝다. 그래도 불꽃 같은 추억은 남아 있다. 비록 가시투성이로 남았지만, 기다리면 또 꽃을 피우지 않겠나. 그동안 가시에 가슴이 찔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