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장대한 흐름에서 보면, 우리의 현대사는 짧다. 더군다나 민주화의 역사는 더 짧다. 인류의 역사가 지구사적 측면에서 보면 찰나에 불과한 것처럼, 이 땅의 민주화 역사는 길지 않다. 그 짧은 시간을 뚫고 시대를 관통하는 것은 4.19혁명과 6.10 항쟁,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이다. 그 바통을 촛불집회가 이어받았다.
그러나 보수정권 9년 동안,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은 진영논리에 밀려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 상징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금지였다.
촛불혁명이 대통령을 파면한 뒤 촛불대선으로 뽑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일 제2호 업무지시를 통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라고 지시했다. 문 대통령의 1호 업무지시가 일자리위원회 구성인 점을 감안하면, 문 대통령은 적폐청산의 첫 업무지시로 왜곡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 장면은 온갖 어려움 끝에 왕위에 오른 조선시대의 정조가 ‘난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밝힌 것을 떠올리게 했다. 정조의 첫 일성은, 잘못된 시대를 바로잡겠다는 개혁의 선언과도 같았다. 물론 역사하계의 평가나 분석은 다를 수 있겠지만.
5.18 기념식에서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그동안 촛불집회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했던 ‘적폐청산’의 신호탄이다. 촛불집회 동안 다양한 형태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불려질 만큼 촛불집회의 상징으로도 자리 잡았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집회 현장에서 늘 불렸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노래를 뛰어넘어 민주화에 대한 신념과 의지, 그리고 연대였다.
우리는, 늘 함께 있었지만, 잃어버린 후 그 소중함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18일 열리는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는 문 대통령도 꼭 참석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가장 앞선 자리에 서서 목소리 높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러야 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문재인 시대가 본격화됐다는 팡파르가 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18일 광주 충장로를 찾아 “한 달 뒤 5.18 기념식에 제19대 대통령 자격으로 참가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문재인 시대는 문 대통령과 정부, 집권층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시민과 더불어 만드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 시대를 관통할 소통과 화합, 연대의 상징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날 5.18 기념식에는 여야 정치인도 대거 참석할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이번 기념식 참석자가 만 명에 달해 지난해의 3배 이상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회 로텐더 홀에서 치러진 대통령 취임 선서가 급박한 상황에서 치러진 약식 취임식이었다면 이번 5.18 기념식은 새로운 의미로서의 대통령 공식 취임식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이날 제창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민주화야말로 문재인 시대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상징이 될 것이다.
문 대통령은 또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하겠다고 공약했다.
현행 헌법 전문에 들어있는 역사적 사건은 3.1운동과 4.19혁명이다. 이제 그 전문에 5.18 정신이 추가된다면 민주화야 말로 우리 시대를 지속적으로 관통하는 시대정신으로 각인될 것이다.
문 대통령은 임기 중 개헌을 공약한 바 있어, 개헌 과정에서 이 공약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데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보수진영에 대해서도 설득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문 대통령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에 대한 업무 지시를 설명하면서 “기념일로 지정된 5.18과 그 정신이 더 이상 훼손돼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시대는 5.18정신이 다시 태어나 모든 분야에서 적폐가 청산되고 민주화가 올곧게 뿌리내리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가는 첩경이다.
[박원식 부국장 겸 정치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