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무선호출기 제조업으로 시작한 팬택은 1997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휴대전화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듬해 글로벌 휴대전화 업체인 미국 모토로라와 전략적 제휴를 체결, 지분 20%에 해당하는 210억원의 자본 투자 유치에 성공해 주목을 받더니, 2000년에는 모토로라와 6억 달러라는, 단일 수출 건수로는 당시 휴대전화 수출 사상 최대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01년에는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의 단말기 자회사인 현대큐리텔을 인수, 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현대큐리텔을 인수한 팬택의 휴대전화 생산규모는 연간 1200만대로 삼성전자, LG전자는 물론 노키아, 모토로라 등 글로벌 기업들과도 규모의 경쟁을 벌일 수 있을 만큼 사세를 키웠다. 2005년에는 SK텔레콤의 휴대전화 생산 자회사인 SK텔레텍까지 손에 넣으며 성장세의 정점을 찍었다.
SK텔레텍을 인수한 그해 팬택은 연간 매출액 3조원을 넘어섰다. 20세기에 설립된 국내 전자·IT기업들 가운데 연간 매출액 3조원을 넘어선 기업은 삼성전자와 LG전자에 이어 팬택이 세 번째였다. 전성기 시절 대우전자(현 대우일렉트릭)도 넘지 못한 엄청난 대기록이다.
하지만, 팬택의 승승장구는 2005년까지였다. 2006년 12월 재무구조 개선작업(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나락의 길로 빠졌다. 지금 와서 보면, 그 때 이미 팬택은 기업으로서의 생명이 끝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당시 팬택이 쇠락으로 떨어진 원인으로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에서 상위 5대 업체의 과점 현상 심화 △중국 휴대전화 업체 도약에 따른 저가폰 시장 잠식 △팬택의 자체 브랜드 육성 실패에 따른 제품 포지셔닝 희석 △이통사 보조금 제도에 따른 판매량 감소 등이 꼽혔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왔던 익숙한 분석일 것이다. 팬택은 워크아웃을 신청할 때도, 2014년 법정관리에 들어갔을 때에도, 새 주인을 만나 지난해 내놓은 ‘스카이 아임백’ 판매 실패 원인도 비슷한 이유로 설명했다. “우리는 열심히 했는데, 시장 상황이 뒷받침되지 못했고, 경쟁사의 견제 때문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난 11년 동안 팬택 자체적으로 이들 문제를 극복해내지 못한 채 같은 변명만 반복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을 얻은 때가 있었다. 팬택은 마케팅과 언론 홍보에 있어 ‘약자의 전략’을 적극 활용해 성공했다. 경쟁사들과 인력 스카우트를 둘러싼 법적 공방에서도, 기술 논쟁이 불거졌을 때에도 팬택은 자사를 약자라고 하고, 경쟁사들이 팬택을 죽이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과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적극 나섰다. 창업자가 출입기자와의 식사자리에서 기자들이 사용하고 있는 경쟁사 휴대전화를 발견하면 그 자리에서 벽에 집어던져 부순 뒤 다음 날 팬택 휴대전화를 선물한 일은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 퍼포먼스는 반발을 살만 했지만 오히려 팬택이었기에 “오죽하면 저렇게까지 분노할까”라고 이해와 동정을 받았다.
팬택의 이미지는 여전히 긍정적으로 남아 있고, 부활을 희망하는 소비자들이 많다. 하지만 언제까지 감성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벤처기업이면서 대기업을 따라한 팽창 위주의 성장 전략이 실패했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생존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지난해 ‘스카이 아임백’이 출시됐을 때에도 팬택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향수 마케팅’을 앞세웠다. 회사 사정상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겠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과 제품 구매는 다른 문제다. 이동통신사 대리점 매대에 진열된 수많은 제품들 가운데, 팬택의 제품을 선뜻 추천하는 판매직원들은 희박할 것이며, 꼭 팬택 제품만을 고집하는 고객들도 없기 때문이다.
팬택이 스마트폰 사업의 중단을 포함한 추가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건 개인적으로는 살아나길 바란다. 하지만, 사업은 냉정하다. 또 다시 과거의 발목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팬택의 부활은 장담 못할 것이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팬택으로 거듭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