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심소희의 치열한 탐구, ‘한자에게 길을 묻다’

2017-05-2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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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소희 이화여자대학교 중문과 교수[사진=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귀밑까지 내려온 단발, 큰 눈, 하얀 피부, 백 팩을 맨 심소희 교수의 모습은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대학교수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베이징(北京)대학교 박사생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심 교수는 “늘 학생처럼 하고 다니다가 오늘은 특별히 오랫동안 하지 않았던 귀걸이를 했다”며 웃으면서 말했다. 기자는 심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베이징대학교 교정을 걸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개나리와 어우러져 운치를 더했다.
그녀는 작은 건물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이곳은 내 스승인 린타오(林焘) 선생의 집이다. 스승님은 작고하셨지만 사모님은 살아계셔 90세가 넘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20여 년 전 한국 유학생 중 한 명으로 베이징대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웠다. 20년 뒤 그녀는 한국 이화여자대학교의 중문과 교수가 됐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어를 배우고 한자를 탐구하는 길은 너무나 멀어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말했다.

“나는 한자에 미친 사람”
심 교수는 한자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한자 교육 시범학교였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한자가 많아질수록 그녀가 아는 한자도 늘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한자왕’으로 모 방송국의 프로그램에 초대손님으로 나가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한문을 배웠다. <논어><도덕경> 같은 고전에서 한자의 ‘아름다움’을 읽어냈다. 심 교수는 “그 책들을 읽으면 뭔가 관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한 구절 한 구절 큰 소리로 읽었는데 읽으면서 음율을 느끼고 동시에 그 속에 담긴 뜻을 헤아렸다. 마치 철학자들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라고 회고했다.
대학 전공을 선택할 때 망설이지 않고 이화여자대학교 중문과를 선택했다. 석사 학위 과정에서는 비인기 분야인 음성학을 선택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음성학을 선택했다. 당시 나는 도전을 좋아해 사람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고 싶었다.”
배움이 깊어지면서 <훈민정음>을 접하게 됐다. 그녀는 한 줄기 빛을 만난 느낌이라고 말했다. 1443년 조선 세종대왕이 창제한 <훈민정음>은 음운학 이론을 운용했다. 우연히도 세종대왕의 왕비인 소헌왕후는 조선 전기 문신인 심온의 딸이었고, 심소희 교수는 심온의 후손이었다. “인천에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집들이 있다. 세종대왕의 왕비가 나의 몇 대 조상이다. 그렇다 보니 <훈민정음>을 다시 봤을 때 다른 사람보다 훨씬 친근감이 들었다.”
심 교수가 제일 좋아하는 시는 이백의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이다. 대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개최한 ‘중국 문화의 밤’ 행사에서 그녀는 옛 사람들이 낭송하는 어투로 이 시를 낭송했다. “그때는 한중 수교 전이라 친구에게 부탁해 타이완에서 녹음테이프를 공수해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 어쨌든 그날 밤 무대 아래에 있던 친구들이 매우 좋아했다.” 이후 이것이 그녀의 ‘특기’가 되어 친구의 결혼식, 동기 모임에서 종종 공연했다. 심지어 그녀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도 흥이 오르면 한 단락을 낭송하기도 했다. 낭랑한 목소리에 혼을 실은 한시 낭송은 감응력이 대단했다.
 

<훈민정음>[사진=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중·한, 공통점과 연결점들
1993년은 한중 수교 2년째 되는 해로 심 교수는 그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양국의 수교 소식을 들은 그녀는 매우 감격했다. ‘중국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하고 싶다’는 꿈을 마침내 이룰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자 뜻밖에 가족 모두가 반대했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비행기가 뜨고 눈 깜짝할 사이에 착륙한 것 같았다. 톈진(天津)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베이징으로 가는 길은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산과 강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풍경에 감탄하며 갔다.”
베이징대학교에 도착하자 이미 밤이 깊었다. 다음 날 그녀는 문을 열고 나와 학교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봤다. 건물 하나하나가 마치 박물관 같았다. 검은 벽에 회색 기와, 우거진 나무 모두가 신선하고 신비로웠다. 그녀는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 한중일 삼국은 문화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색을 갖고 있다. 게다가 서로의 거리가 가깝고 역사적 연원도 매우 깊다.” 중국에 와서 외국인의 입장이 된 그녀는 국가라는 단어를 생각해보게 됐다. “국가라는 개념은 근대 들어 생긴 것으로 고대 왕조에서는 국가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문화를 토론하고 한자를 연구하다 보니 국가의 범위를 초월한 것이 많았다.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뿌리를 탐구하면서 그 안에 담긴 공통점과 연결점을 찾았다.”
초기 중국 유학생이었던 그녀는 이곳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았다. 마침 베이징대학교 이위안(藝園)식당을 지나가는데 그녀는 당시 이곳은 활동센터였다고 소개해주었다. “하루는 이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한국 음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당시 한국에서 유행했던 힙합을 추고 있어 깜짝 놀랐다. 이후 기차를 타고 광둥(廣東)으로 가는 길에서도 한국 노래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H.O.T, 코요태가 인기가 많았다.”
베이징아시안게임이 끝나고 얼마 뒤 그녀는 중국이 열정과 활력이 넘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곳곳에서 도로를 내고 고층빌딩을 지었고 사람들은 투자 가능성을 모색했다.” 한중 수교를 한 지 1년 밖에 안 지났지만 베이징대학교로 유학 오는 한국 학생이 많아졌다. 그녀는 성운학으로 연구 방향을 잡았다. 음성학에 비해 성운학은 공시성 연구를 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이런 연구는 상대적으로 더 과학적이다. 박사 단계에서 그녀는 중국어와 한국어의 어음(語音) 차이를 연구했다. 예를 들어 끊어 읽기, 간격 등 구절의 리듬이다. 설명을 하면서 그녀는 종이에 예를 적어주었다. “‘한국인화중국인(韓國人和中國人, 한국인과 중국인)’을 예로 들면 중국인은 100% ‘한국인/화중국인’이라고 끊어 읽는다. 하지만 이제 막 중국어를 배운 한국인에게 물으면 100% ‘한국인화/중국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 다를까? 다름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흥미롭지 않은가?”
성운학을 공부하면서 심소희는 중국어 발음과 한국어가 매우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1443년 한글 창제 전 사용한 문자는 모두 ‘글자를 빌어 음을 표시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즉 한자로 표시했지만 어음은 당시 한반도 사람들이 사용한 발음을 사용했다. 한국어 특유의 어법 형태, 예를 들어 조사와 접미사 등은 한자의 독음을 빌어 표기했다.
 

심소희 교수와 학생들[사진=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작은 강단, 큰 무대
심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점은 그녀가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자신이 몸담은 분야 뿐 아니라 국가와 국가간, 문화와 문화간 연결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속에 담긴 관계를 탐구하는 것도 그녀를 매료시켰다.
심 교수는 신이 나서 한자의 음운학은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소개했다. 동한(東漢) 초기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을 때 불교 교리가 담긴 불경은 모두 산스크리트 문자로 씌여져 있었다. 불경을 공부하려면 중국인은 먼저 산스크리트어를 배워야 했고, 불교를 전파하러 온 인도 고승들은 중국어를 배워야 했다. 이렇게 교류하면서 중국 학자들은 산스크리트어의 병음 방법에서 영감과 영향을 받아 반절법을 발명했고, 중국어 어음 구조 분석에 효과적인 방법을 얻었으며, 운서(韻書)를 발명했다. 당송 음운학은 조선에 영향을 주었다. 한자 어음 연구에 조예가 깊었던 신숙주, 성삼문 등 학자는 당시 조선의 어음 상황에 따라 조선에서 사용하는 한자 음을 통일하고 정정했다. 이 역시 이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 중 하나다. “문명은 모방이 아니라 재창조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 상황에 따라 외래 문명을 재창조했고 이것이 문화의 융합이다.”
심 교수는 요즘 한국에서는 중국어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이 많아졌다며 일부 기업에서는 중국어 학습반을 개설했고 대부분의 학교에서 중국어를 필수과목으로 다시 편입시켰다고 말했다. “몇 년 전까지 학생 대부분이 일본어나 유럽 언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은 80-90%가 중국어를 선택한다. 한국어 단어의 70%가 한자이기 때문에 한자도 한국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창이다.”
2015년 11월 <한중일 공용한자 800자>가 발표됐다. 책임편집자 중 한 명이었던 심 교수는 이 임무를 맡고 매우 흥분됐다고 말했다. 삼국이 공통적으로 자주 사용하는 한자의 의미와 용법이 어떻게 다를까를 찾는 태도로 심소희 교수와 팀은 많은 연구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을 벗어났다. 808개 한자는 각국의 언어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됐던 것이다. 이런 유사성은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동아시아문화권에 있는 삼국이 언어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것에 다시 한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자를 배우고, 한자를 연구하는 것에서 다시 한자를 가르치게 된 심 교수는 학생들을 통해 기쁨을 얻었다. 그녀는 선생으로서 제일 기쁜 일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녀는 “학생들의 질문에 답하고 그들 각자의 장점을 찾아 이끌어주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녀와 같이 베이징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친구들 중에는 회사를 차린 사람도 있고, 기업 임원이 된 사람도 있지만 심 교수는 물질과 명리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20여 년 동안 그녀는 좋아하는 한자 연구에 파묻혀 배우고, 가르치고, 다시 배우고, 다시 가르쳤다. 작은 강단은 그녀의 가장 훌륭한 일면을 볼 수 있는 무대다.
인터뷰 당일, 마침 베이징대학교에서 그녀의 강의가 있었다. 기자는 ‘청강생’ 신분으로 그녀와 함께 교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준비한 영상 자료를 한 번 보여주고 학생들에게 대사를 들으며 받아쓰라고 시켰다. 그 다음 조별로 나누어 역할극을 해보도록 했다. 짧은 한 시간 동안 심 교수는 학생들의 발음, 어조를 일일이 고쳐주었다. 그녀 자신도 각 조의 발표에 푹 빠져들어 기분 좋게 웃거나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요즘 학생들은 나 때와 많이 다르다. 머리가 훨씬 잘 돌아가고 시야도 더 넓다. 학습력과 수용력도 매우 빠르다.” 그녀의 학생들은 이 외국인 선생을 친근하게 대하면서도 존경심을 보였다.
중국어든 한국어든 서로 통하는 언어는 한 사람과 한 나라, 한 사람과 한 집단을 연결해준다. 한자의 신기, 문화의 묵계, 심소희 교수는 나라와 나라 사이에는 서로를 더 가깝게 하는 모종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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