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드보복 조치’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함께 지난해말부터 국민의 대표적인 ‘공분뉴스’로 자리잡았다. 그런 탓에 수개월을 지나면서 언론 등을 통해 중국의 ‘사드 몽니’에 대한 대처법도 여럿 거론됐다. 하지만 현재까지 ‘명백한 해법’이 안보인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국가경제와 민간경제의 피해만 더 커져가는 형국이다.
정부 역시 대중국 사업과 연관된 개별기업의 우회적인 지원을 발표하는 수준일 뿐, 중국을 향해 강력한 경고, 항의를 표하거나 WTO(세계무역기구) 제소를 통해 국제사회에 중국의 부당함을 알리는 등의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있다.
정치∙외교적 이유를 들어 중국이 타국에 취한 경제보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프랑스 역시 정치보복의 피해국가다. 2008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티베트 망명정부의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접견하자, 중국은 이를 빌미삼아 당시 프랑스로부터 구입하기로 약속했던 에어버스 150대 수입을 전면 취소했다. 이듬해인 2009년, 프랑스 정부가 티베트 독립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확인해주고 나서야 양국간 관계가 회복됐다.
우리와 가까운 일본은 2010년 영유권 분쟁을 벌이던 중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인근에 들어온 중국 어선의 선장을 체포했다가 ‘희토류 보복’으로 되받은 케이스다.
희토류는 전기차 배터리, 스마트폰 등에 들어가는 금속원소로, 전세계에서 중국이 90% 이상을 생산한다. 당시 일본의 중국산 희토류 수입비중이 전체의 85%선인 상황에서 중국은 일본에 희토류 쿼터량을 전년보다 40%나 축소했다.
하지만 일본은 앞선 두 국가처럼 중국에 ‘굴욕외교’로 사태를 해결하진 않았다. 중국산 희토류 수입이 막히자 대체품 개발에 착수했고 수입 원천지를 개척하는 등 위기극복에 정부와 기업이 함께 했다. 수출 쿼터 제한과 관련해서는 미국, 유럽연합(EU)과 손잡고 WTO에 제소, 2014년 8월 중국 패소판결을 끌어내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이번 사드 보복에 앞서 2000년 ‘한중 마늘 분쟁’을 통해 한 차례 보복의 희생양이 된 전력(?)이 있다. 당시 중국은 한국내 중국산 마늘 수입물량이 많아져 한국정부가 국내농가 보호차원에서 세이프가드 조치를 취하자 그에 반발해 한국산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의 수입 전면조치를 내렸다.
중국의 한국산 휴대폰·폴리에틸렌 수입 규모와 한국의 중국산 마늘 수입액 격차가 무려 50배에 달한 것으로, 이는 명백히 WTO 규정에 어긋났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제소는커녕, 오히려 “3년간 중국산 마늘을 30~50%의 낮은 관세로 수입하겠다”고 중국에 고개를 숙여 사태를 수습했다.
시간을 더 거슬러 993년,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했다. 송나라와 전쟁 중이던 거란은 당시 친송(親宋)정책을 펼쳐온 고려에 반발해 대규모 군사를 보내 정벌할 요량이었다. 고려의 외교가이자 문신인 서희가 거란 장수 소손녕과 담판에 나섰다.
고려 조정과 신하들은 서희에게 거란이 원하는 서경 이북 땅을 떼어주고 화평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서희는 거란의 침략의도가 ‘친송정책 철회’와 ‘고려-거란 간 교류’라는 것을 간파하고 거란과의 교류를 성사시켰다. 대신에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압록강 동쪽에 위치한 강동 6주를 얻었다. 하나를 주고 둘 이상을 얻은 것이다.
지금 중국은 사드배치를 내세워 암묵적으로 한국에 친미(親美)정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 수단과 압박카드로는 한국관광 금지, 한국기업 영업정지, 한국산 불매운동 묵인 등이다. 수출의 25%, 국내관광객의 47%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그 압박카드가 두렵기는 하다.
하지만 최악의 위기상황에서 나라를 구했던 서희의 외교술처럼 정부와 기업, 그리고 국민이 머리를 맞대 최적의 해법을 찾는 현실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중국과 직접적인 담판에 나서야 하는 한국정부의 외교술과 용맹함이 무엇보다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