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고 의심하며, 다그치기를 반복하는 박정민은 고통스럽고 고달프게 연기를 배워나가고 있다. “이과(理科)에 가까운 터라” 무작정 그 인물이 되기보다는, 설득의 과정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박정민 자신을 넘어 관객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어떤 작품, 캐릭터를 연기하든 박정민은 ‘설득’의 과정을 생략하지 않았다.
지난 9일 개봉한 영화 ‘아티스트:다시 태어나다’(감독 김경원·제작 ㈜영화사 소요 ㈜백그림·배급 ㈜콘텐츠 판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화는 어느 날 눈을 뜨니 세상을 발칵 뒤집은 아티스트로 탄생한 지젤(류현경 분)과 또 다른 아티스트 재범의 비밀을 다룬 작품이다. 순수한 예술을 지키고 싶은 지젤과 유명 갤러리 관장 재범의 서로 다른 예술 지키기가 돋보인다.
이번 작품에서 박정민은 아티스트를 통해 진짜 예술을 만들어내고 싶은 아티스트 재범을 연기했다. 보는 눈이 좋은 유명 갤러리 관장으로 분한 그에게, 재범을 ‘설득’하는 과정을 물었다.
2년 만에 개봉한 영화다. 다시 본 소감은 어떤가?
재범은 예술의 이상보다는 현실에 타협하는 인간이다. 연기자의 입장에서는 재범보다 지젤에 몰입하기가 더 쉬웠을 것 같은데?
- 그렇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땐 지젤에 더 공감이 갔고, 감정 이입이 됐다. 지젤은 자신이 가진 정도와 양심을 지키려고 하는 인물이고, 재범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극단적 방법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저는 지젤의 텍스트가 더 인상 깊었다. 저 역시도 초심과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타협해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리니까.
이해가 어려운 재범에게는 어떻게 접근했나?
- 재범에게 공감하기 위해서 저와 비교를 많이 했다. 극 중 인물들이 워낙 일상적이지 않고 주변에서 잘 볼 수 없는 캐릭터지 않나. 소재 역시 뉴스에서나 볼 법한 사건이니 어떻게 하면 ‘진짜’처럼 보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최대한 일상적인 부분, 관객과 크게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지젤과 재범은 어쩌면 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본적 바탕은 같다고 할까? 예술가의 두 신념·자아의 충돌 같기도 했다. 본질을 지키자 vs 타협하자 같은?
- 그런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다. 상황이 두 사람을 갈등하게 한 거다. 그래서 재범을 연기할 때도 상황에 대입하려고 했다. ‘만약 나라면?’ 기본적으로는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졌으니까 그런 극단적 상황과 마주한다면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어떤 짓도 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재범과 지젤의 기본 바탕이 비슷한 만큼, 연기 톤 역시 맞춰나가는 게 중요했을 것 같다
- 현경 누나 외에도 모든 선배와 연기 톤을 맞추는 건 중요했다. 현경이 누나와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건 주변에서 볼 수 없는 인간들을 어떻게 하면 진짜처럼 보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촬영 1~2시간 전에 모여서 상황에 몰입, 감으로 가보자고 했다. 재범이 끊임없이 지젤을 설득하지 않나. 관객들이 보기에 이런 모습이 ‘허세’처럼 보이길 바랐다. 그리고 이후 미술에 대한 열변이 ‘별짓 다 한다 ’처럼 한심하게, 진짜처럼 보이기를 바랐다.
미술관 관장으로서도 활약하는데 이에 대한 직업 탐구는 없었나?
- 직업 탐구보다는 재범의 상황, 심리를 더 표현하고자 했다. 제가 어떤 변호사분을 만나고 너무 일반인 같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미술관 관장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재범은 지젤에게 ‘예술적 본질은, 인정받는 것’이라고 한다. 박정민에게도 마찬가지일까?
- 저 역시도 인정받고 싶다. 싫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예전보다 인지도가 쌓인 지금, 돌이켜보니 돈이나 인기는 따라오는 거더라. 인지도를 높이려 선택한 작품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제게 인지도와 인기를 선물하지 않았다. 또 정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서 연기 외에 모든 건 결국 부수적이란 걸 알았다. 물론 운이 필요하다는 것도. 그러니까 결국 연기를 잘해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걸 전달하는 게 배우의 본질인 것 같다.
작품에 대해, 캐릭터에 대해 그리고 심지어는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는 것 같다
- 저는 캐릭터에 몰입하기까지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고 의심하고 궁금해한다. 제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 탓일까? 수학 같지가 않고 답도 딱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인생 역시 논리적이지 않은데 왜 이렇게 답이 떨어지길 바라는지 (저 역시도) 모르겠다.
물음표가 많다는 건 반대로 장점일 수도 있지 않나
- 입체적으로 살아난다는 장점도 있겠지만,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니까 한순간에 그 인물로 몰입할 수가 없다. 그래서 너무 속상하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도, 영화 ‘동주’, ‘파수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하다면 철저히 파헤치고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만날 때마다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세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 그 스트레스를 즐긴다. 저를 궁지로 몰아세우는 걸 좋아한다. 그때 나오는 극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다. 이 맛에 연기하는 건지.
궁지에 몰려야 히든카드를 내미는 스타일인가 보다
- 그런가? 그런 것 같다. 하하하. 저는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
주변에서도 박정민의 이런 ‘설득’의 과정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를 성장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는데
- 주변에서 많이 뿌듯해하신다. 그들 입장에서는 성장이라고 느끼는 모양이다. 저도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당면해 있으므로 그냥 막 저를 때리는 거다. 앞으로도 힘들게 연기할 거고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또 다음 것이 있겠지. 잘 유지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