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률(協律)은 ‘음악의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오늘날의 ‘공연’을 뜻한다.
인천의 협률사는 1902년 서울 정동에서 문을 연 협률사(協律社)보다 7년, 1908년 이인직(李人稙)이 종로 새문안교회터에 창설했던 원각사(圓覺寺)보다 13년이나 먼저 개관했다.
인천 협률사에 대한 언급은 고일(高逸)의 『인천석금』(1957)과 최성연(崔聖淵)의 『개항과 양관 역정』(1959)에 근거한다.
고일에 의하면 “인천의 부호 정치국은…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주해와 성공한 재산가이다…그는 용동(龍洞)에 창고 같은 집을 지었다.
이것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극장 협률사(協律舍)이다.”라 하였고, 최성연 역시 “그 당대 인천의 부호 정치국 씨가 운영하던 협률사(協律舍)라는 연극장이 있었다.
협률사는 오늘의 애관(愛館)의 전신으로서, 일청전쟁(1894~95) 중 지었던 단층 창고를 연극장으로 전용하였다.”라고 했다.
인천 지역사 연구에 큰 비중을 갖는 두 사람이 협률사의 설립자로 모두 정치국을 지목하고 있는데, 개관 연대에 대해서는 최성연만이 ‘일청전쟁(1894~95) 중’건축한 것으로 그쳤지만, 이것이 오늘날 1895년을 협률사(協律舍) 개관 연도(年度)로 잡는 계기가 되었다.
협률사는 이후 신파극 ‘육혈포 강도’의 인천 공연을 왔던〈혁신단〉임성구의 제안에 따라 1912년 ‘축항사(築港舍)’로 개칭되었고, 1921년에는 애관(愛館)으로 다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27년(10.10)에 건물을 신축했다.
이 공간을 통해 극작가 진우촌·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 등 기라성 같은 인천 문화계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개항 이래 격동의 긴 시간동안 인천 문화예술의 큰 축으로 자리매김한 협률사는 문화예술인들의 혼이 담겨 있는 산실이자 인천 문화예술의 선구지로서 그 저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늘날 인천의 문화예술 활동은 이러한 토양으로부터 출발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