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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사진=삼성그룹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사람들은 흔히 나의 수집품에는 명품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평가는 자유지만 나는 수집 자체 보다는 그런 골동품으로부터 마음의 ‘기쁨’과 정신의 ‘조화’를 찾는다. 그런 이유에서 폭 넓은 수집보다는 오히려 내 기호에 맞는 물건만을 선택한 것이 나의 소장품이다.”
1976년,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가 니혼게이자이신문에 기고한 미술 취미에 관한 글중 한 대목이다.
발제를 맡은 남정욱 대한민국문화예술인 공동대표는 “호암은 문화재 유출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골동품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호암이 골동품을 수집하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은 문화재 보호법도 없었고, 문화재 수집에 대한 일반인들의 식견이 높지 않아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로 빠져 나가던 시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호암의 시대는 산업보국의 시대였다. 그 무게에 눌려 자유로운 개인의 정신활동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받을 수 없었다”면서 “그런 와중에도 미술품을 사 모으고 그것을 미술관(호암 미술관) 설립이라는 업적으로 이끌어 낸 것은 호암이 예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예술적 기업인”이라고 평가했다.
남 대표는 “호암의 예술 감각은 선친인 문갑 애호가인 이찬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으며, 그의 아들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개화한다”면서 “이건희 회장은 전형적인 예술가형 기업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이건희 회장의 감각이 좋았더라도 선대의 호암 미술관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리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겅조했다.
토론을 맡은 곽은경 자유경제원 시장경제실장은 “시장경제가 발전할수록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비물질적 분야에 도움을 주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해진다”며 “호암이 세운 호암미술관과 이건희 회장이 세운 리움미술관은 국보 37건과 보물 115건을 보유해 박물관 못지않은 소장품으로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해왔다”고 강조했다.
곽 실장은 “한국에선 기업의 문화예술 후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며 “예술품 수집과 같이 대중이 보기에 고상한 취미일 경우 사치행위로 비판을 받는가 하면, 기업의 후원을 당연히 내야 하는 준조세로 여긴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비난은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드는 문화, 예술분야가 발전할 기회를 가로막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다인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석사과정은 “우리 문화재를 찾아와야겠다는 호암의 의지는 박성용 금호아시아나그룹 선대 회장과 간송(澗松) 전형필 보다 한수 위다”고 평가했다.
김 씨는 1979년 10월 일본 야마토분카칸에서 열린 고려불화 특별전에서 한국인이 경매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호암이 미국 고미술 전문가를 앞세워 경매에 참가한 일화를 소개했다. 이 때 사들인 작품 2점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국내 대표적 고려불화로 평가받고 있다.
김 씨는 “호암의 인재양성은 예술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며 “독서문화 확산을 위한 ‘삼성문화문고’를 예로 들었다. 호암은 삼성문화문고를 통해 국내외 양서들을 문고판으로 발간, 고등학교와 대학 도서관, 공공 도서관, 군부대에 기증했다. 출판은 1989년경까지 300여 종, 총 간행 부수는 1000만 부를 넘었다. 내용과 권위를 인정받아 여러 학교와 단체에서 교양서로 채택하는 경우도 많았다.
자유경제원은 “호암은 ‘기업이 있는 곳에 문화예술도 꽃 핀다’라는 명제를 증명해낸 기업인”이라며 “호암은 문화예술 분야의 발전이 개인과 국가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삼성의 각종 문화예술 저변화 사업이 이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삼성그룹은 호암 탄생과 관련한 별도 행사는 마련하지 않았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