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한준호 기자 = "비핵·개방·3000을 설명하다가 세월 다 보냈습니다"
지난 2013년 이명박 정부 임기를 마치며 기자와 만난 외교안보 관계자가 5년 동안의 대북정책 성과를 돌이키며 했던 말이다. 그는 "다음 정권은 부디 캐치프레이즈와 같은 난해한 문구를 정책 명칭으로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비핵·개방·3000'은 간단한 캐치프레이즈처럼 들렸지만, 그 설명은 말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책을 추진했던 당사자들은 쏟아지는 질문에 답하느라 진땀을 뺐다. 단순해 보였던 캐치프레이즈 안에 숨은 세세한 부분과 3000달러 국민소득의 근거를 제시하고 설명하는데 5년이라는 시간도 모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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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핵심 경제정책 '창조경제'도 이와 비슷하다.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를 "국민 개개인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과학기술과 IT를 접목하고 산업과 산업, 산업과 문화의 융합을 촉진해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지금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결국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중점을 두는 부분이 창업 활성화와 대기업과 스타트업 간 협업인데, 굳이 창조경제라는 어려운 캐치프레이즈를 쓰지 않아도 창업이라는 단어와 연계한 이해하기 쉬운 명칭을 선택했다면 더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최근 최양희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은 기자단과 함께한 송년회 자리에서 창조경제 명칭 변경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창조경제라는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정비하는 것은 예산과 역량 낭비만 초래하게 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창조경제센터를 창업센터로 바꾸고 다음 정부가 또다시 창의센터로 바꾼다면 창업센터는 고작 수개월짜리 이름에 불과하다"며 "더 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게 필요하다"고 명칭보다는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정부가 연말에 발표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기 위한 '지능정보사회 중장기 종합대책'도 그렇다. 미국이나 일본에선 모두 인공지능(AI)이라는 널리 알려진 단어로 쉽게 표현하고 있지만, 우리는 지능정보(Intelligence Information)라는 말을 사용한다.
미래부는 지능정보가 AI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지능정보기술이 기계가 AI와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빅데이터, 모바일 등 ICT 인프라를 통해 데이터를 스스로 학습하고 인간의 고차원적인 인지, 학습, 추론 능력을 구현하는 기술이라는 복잡한 뜻이 담긴 단어인데, 쉽게 말하면 지능정보는 AI뿐만 아니라 IoT도 빅데이터도 다 한다는 얘기다.
미래부는 지능정보가 AI보다 더 큰 개념이라고 홍보하고 그 의미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 해외에선 모두 AI로 통한다. 국내도 AI로 잘 통하다가 지능정보라는 말이 갑자기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동통신, IT서비스 관계자들을 만나 지능정보라는 말을 꺼내면 한 번에 알아듣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다. AI라고 다시 고쳐 말해야 이해하는 경우가 더 많다. IT 관계자들도 생소해 하는 지능정보라는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능정보사회 중장기 종합대책’은 4차 산업혁명에 재빨리 대응하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다. 이제 정책 내용에 대한 활발한 토론과 실천, 정책추진이 중요해질 시점에 지능정보라는 단어의 뜻을 설명만 하다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