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지난 6일 국조 청문회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은 전경련 탈퇴를 분명히 했다. 이에 반해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전경련은 (미국) 헤리티지 단체처럼 운영하고 (기업 간) 친목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조건부 탈퇴론을 제시, 전경련의 자구 노력을 보고 판단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하지만 불과 20여일만에 LG그룹이 전격 탈퇴를 선언한 것은 후에 이어진 전경련의 쇄신의지에 대해 구 회장이 크게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전경련 해체론의 발단을 제공한 이승철 상근부회장 등 기존 임원진들이 주도하는 쇄신안은 결국 그들의 자리지키기 수단으로밖에 비쳐지지 않고 있다"며 "재계는 이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과 SK 등 다른 그룹들도 전경련 탈퇴 작업을 진행 중이다.
삼성측은 “이미 탈퇴 의사를 밝힌 만큼 시기만 조율하고 있다”고 했고, SK 관계자는 “조만간 결정을 낼 것”이라고 했다.
전경련은 회원사들로부터 연간 약 400억원의 회비를 걷는데, 4대 그룹이 절반 정도를 부담한다. 특히 삼성은 100억원 가량을 내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여기에 그룹 총수가 전경련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한화, 한진, 금호아시아나 그룹 등도 탈퇴 쪽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다른 대기업들의 탈퇴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은 이미 탈퇴 절차를 진행중이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국책은행은 지난 12일 전경련에 탈퇴 서류를 제출해 관련 절차가 진행 중이다. 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도 이날 탈퇴에 동참했다. 시중은행 중에서도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등이 전경련 탈퇴를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회원사들이 탈퇴라는 초강수를 둔 것은 전경련의 더딘 쇄신작업을 압박하기 위한 제스처라는 분석도 나온다.
재계 고위임원은 “회원사가 일시에 빠져나가야 전경련이 보다 근원적인 혁신안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라 보고 단체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어 “전경련에 대해 불만이 있더라도 어쨌건 재계는 자신들의 입장을 정부에 개진할 수 있는 단체를 필요로 한다"며 "따라서 전경련 탈퇴 → 전경련 해체 → ‘신 전경련’ 설립 → 회원사 가입'이라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반도체 빅딜’ 아픔도 영향 미친 듯
재계 일각에서는 구본문 회장이 전경련에 갖고 있는 오랜 앙금이 이번 결정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김대중 정부가 ‘반도체 빅딜’을 추진했을 때, 인수 주체를 놓고 LG그룹과 현대그룹이 갈등을 빚었다.
이 때 빅딜을 중재한 전경련이 사실상 정주영 회장의 현대그룹측에 손을 들어줬고, 구 회장은 김 대통령과 독대 끝에 LG반도체를 현대전자에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동안 구 회장은 전경련 건물 쪽은 고개를 돌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분노를 나타낸 바 있다.
전직 LG그룹 관계자는 “구 회장은 전경련을 접할 때마다 LG반도체의 아픔을 떠올렸다고 한다 . 기업가로서 그 때만큼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적은 없었을 것”이라며 “그 때의 상처 때문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전경련 탈퇴를 결정할 때 어느 정도 반영은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