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천(司馬遷, BC 145~BC 86) 『사기』, ‘화식열전’
사람이 살면서 웬만큼 산전수전을 겪지 않고서는 사마천 앞에서 입도 벙긋 할 수 없을 것 같다. 황제의 총신에서 하루아침에 사형수로 굴러 떨어지고, 결국 치욕의 극치인 궁형까지 당했던 사마천. 그의 불멸의 역사서 『사기』는 제왕의 연대기인 본기(本紀) 12편, 제후와 왕을 중심으로 한 세가(世家) 30편, 역대 제도 문물이 연혁에 관한 서(書) 8편, 연표인 표(表)10편, 시대를 상징하는 뛰어난 개인의 활동을 다룬 전기 열전(列傳) 70편, 총 130편으로 구성됐다.
열전의 첫머리에는 이념과 원칙에 순사(殉死)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지식층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두 위인인데도 중국에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상하다? 소장하고 있는 많은 책들이 첫 부분은 손때가 묻고 귀퉁이가 닳아 너덜너덜하나 뒷부분은 마치 방금 구입한 새 책처럼 순결(?)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 옛사람들도 열전을 펼쳐놓고 아마 첫 부분만 열심히 공부한 것 같다. 『사기』중 백미는 열전이고 그 백미 중의 백미는 제일 끝 부분에 있는데.
『신약성경』의 맨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이 있다. 흔히 ‘요한계시록’은 신·구약 『성경』의 완성이자 결론이다. 마찬가지로 ‘화식열전’은 『사기』의 완성이자 결론이다. ‘화식열전’을 읽지 않고서는 『사기』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 전 쓰인 열전은 역사서이자 예언서이다.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엄숙주의와 도덕적 교조주의에 의해 오랜 세월 매몰되고 망각돼 왔지만 ‘화식열전’은 인간본성에 대한 통찰력이 가장 첨예하게 빛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열전의 앞머리인 백이숙제 부문만 읽었거나 그런 류만 달달 외운 도덕론자나, 공자의 유학이 아닌 주자의 성리학을 유교라는 종교의 일종(철저한 비종교적인 사상내지 생활철학인 유학을 종교로 떠받드는 신비한 아침의 나라, 대한민국)으로 떠받들며 격식과 체통을 중시하는 유교(주자학)의 문화적 토양에서 살아온 우리나라 지식층에게는 『사기』의 맨 끝의 '화식열전'은 어쩌면 ‘이욕에 눈 먼 시정잡배들의 잡설’ 이라는 부제라도 달아 비난하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는 악마 같은 글이다.
‘화식열전’을 읽고 난 후 필자에게는 책을 사면 우선 책의 맨 뒷부분부터 읽는 습관이 생겨났다. (1)*그리고 중요한 몇가지 사항을 더불어 깨우치게 되었다.
첫째, “진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적용된다”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다. 『성경』의 ’요한계시록‘이 미래시제로 기록됐다고 해서 미래에 일어날 일로만 보면 안되듯 『사기』의 '화식열전'의 기록이 과거시제로 기록됐다고 해서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로만 여기면 크나큰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역사는 다만 지나간 일의 기록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3000년 전 상(商, 일본에서는 별칭 殷나라로 씀)나라의 후예들인 '상인종(商人種)' 중국인, 그들이 의식·제도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과 행위에 철제 족쇄를 채웠던 기간은 공산당 정부수립의 1949년부터 개혁개방의 길로 나선 1978년까지 불과 30년뿐이었다. 3000년 유구한 상인의 역사에 비하면 1%밖에 안되는 매우 짧은 기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우리나라와 달리 예나 지금이나 『사기』열전 편의 앞머리인 명분의 '백이숙제'보다 맨 뒷부분 실리의 ‘화식열전’에 더욱 매료되고 열광해왔다는 점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자존심 높은 중국인이 한국인을 경탄해 마지않는 몇 가지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한국인의 순열한 애국심이다. 가깝게는 IMF 시절 온 국민이 다시 한 번 나라를 살려보자며 동참한 금모으기 운동과 멀게는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기 위해 꽃다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등 수많은 항일 독립투사들, 중국인들은 대부분은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들이라고 말한다. 중국인들은 애국이 뭐고 나라가 대관절 뭔데, 천하에 둘도 없는 자신의 목숨이나 또 그 목숨만큼 귀중한 금붙이를 뭐 하려고 나라에 바치는가, 고개를 심히 갸우뚱거린다.
근세 이래 중국인은 사실 민족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 등 ‘주의’를 그저 깃발로만 내세우고 무늬로만 치장한 적이 많다. 지금의 사회주의시장경제에서의 ‘사회주의’도 그렇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사회주의는 악센트도 없고 콘텐츠도 없는 공정한, 공평한 따위의 단순 소박한 ‘평등의 동의어’쯤으로 변질해 버렸다. 그런데도 일본과 서방의 일부 이데올로그들은 사회주의가 중국의 본질인양 착각한다. 또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설정해놓고, 중국이 조만간―그 ‘조만간’은 계속 연장되고 있다―구소련과 동구권의 전철을 밟을 거라고 공언하며 아직도 중국분열론, 중국붕괴론 등에 매달리고 있다. 사반세기가 넘도록.
중국인은 한국인이 다 걸기 하며 싸우는 지고지순의 이념조차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실리를 위한 도구로 쓰는데 도가 텄다. ‘박리다매,’ 중국인에게 박리는 수단이고 다매가 목적이다. 즉, 박리를 선전용 이념으로 내걸어놓고 그것을 다매를 위한 수단으로 쓰고 결국은 진짜 목적인 ‘후리다매’를 달성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시장경제’도 마찬가지. 중국에게 사회주의는 수단이고 시장경제가 목적이다. 즉, 사회주의를 선전용 이념으로 내걸어놓고 그것을 시장경제를 위한 수단으로 쓰고 결국은 진짜 목적인 부국강병의 ‘중국식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좌회전 깜빡이를 켜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우회전하는 게 중국이고 중국인이다. 왜 좌회전하지 않았느냐고, 속았다고 원망하지 말라. 그게 중국이고 중국인이다.
국민 대부분이 애족애국자인 한국인과 달리 그 많은 중국인들 가운데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하고 국가를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바친 위인의 수는 손가락으로 꼽기에도 힘들 만큼 드물다. 실제로 중국에서는 ‘애국심’보다 ‘애국주의’라는 말이 훨씬 많이 쓰인다. 중국인의 가슴속에는 ‘애국’이 ‘마음’에 있는 게 아니라 마음 바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그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외국인이 중국인을 이야기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써온 ‘실리주의’, ‘실용주의’ 따위의 상용어들은 정작 중국인에게는 무척 희한하고 생경한 단어들이다.
오직 ‘실리’와 ‘실용’ 그 자체만 있을 뿐이다. 중국인에게 실리와 실용, 그 자체가 생명이고 삶인데 감히 ‘주의’ 따위의 사족을 붙이려 드는가! 중국인의 일상용어 ‘셩이’(生意)는 왜 사느냐 따위의 형이상학적 의미가 아니다. 장사나 비즈니스를 뜻한다. 중국인이 추구하는 삶이란 한 마디로 장사를 잘해 잘 먹고 잘 사는 데 있다. 자본주의 상징, 아니 그 자체라도 해도 좋을 지폐와 수표와 어음 등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고 상용해온 중국인이다. 그래서 말인데, 중국인의 유전인자(DNA)는 돈(Don)의 D와 나(Na)가 합쳐진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세상의 모든 돈을 빨아들이려는 돈의 초대형 진공청소기 모습으로 물신화한 거대중국을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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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사기』 ‘화식열전’을 읽고 난 후부터 필자는 책을 쓸 때 자신도 모르게 맨 끝부분에 책의 핵심 본령을 쓰는 습관이 생겼다. 예: 『중국의 습격』, 제23장, 중국, ‘제주-이어도 점령이 제일 쉬웠어요’ / 『중국의 슈퍼리치』, ‘제5부 법과 제도의 나라 중국’ 등
[참고문헌]
강효백,『중국인의 상술』, 한길사, 2002
강효백, 『중국의 슈퍼리치』, 한길사,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