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한국무역협회를 떠나면서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어떤 미련도 없었다. 세상이 올바른 사람이 행세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워져 있는 터에 비리(非理)에 가담하면서까지 자리에 연연할 아무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해방 후 같이 재계(財界) 활동에 나선 우계(友溪) 전용순(全用淳) 만은 대한상공회의소 회두(會頭)로 건재하다지만 그것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이지 이미 그도 거세된 존재로서 처지가 같은 것이었다.
협회를 그만두고 며칠 안 된 날이었다.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대구로 거처를 옮긴다는 소식을 접한 목당은 그를 댁으로 찾았다. 마침 인촌은 유성기를 틀어 놓고 창(唱)을 듣고 있었다. 활짝 열어젖힌 창밖에는 플라타너스잎이 동전만큼 피어 살랑거렸다. 목당은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말솜씨가 없는 목당은 병문안을 한다든가 하는 일이 질색이었는데 이런 환경이라면 화제를 쉽게 끌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옥고(獄苦)로 반신불수가 된 독립투사 김창숙(金昌淑)의 병을 고쳐서 이름이 난 박 모(朴某)라는 안마사의 안마를 받기 위해 대구로 옮긴다는 인촌이었는데, 이날의 화제는 자연 창(唱)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인촌은 영국의 호텔방에서 레코드를 틀어 놓고 창을 들으면서 술을 마시던 일들까지 떠올리면서 순진한 미소를 머금었고, 목당은 인촌의 그런 즐거운 추억을 깨지 않기 위해 같이 장단을 맞추었다. 실상 목당도 런던에서의 인촌의 창 취미에 물들어 그 후 주홍이 돋으면 춤을 추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인촌은 목당보다 8세 위로서 63세였음으로 다시는 기동하기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중병(重病)의 몸으로 이승만(李承晩)에게 부통령 사임이유서(辭任理由書)로 도전장을 내고는 반독재 호헌구국(護憲救國) 선언대회까지 계획했다가 불발탄으로 끝나 더욱 실의(失意)에 빠져, 이제는 다만 병석에서 아픈 마음을 창으로 달래는 인촌을 보며 목당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걷는 길은 달랐다고 하지만 건국과 입국(立國)이라는 한길을 걸어 왔던 인촌과 그가 아닌가. 그리고 한 사람의 횡포하고 파렴치한 전제준주적 독재자에 농단되어 뒷전으로 팽개쳐진 점도 그들은 공유하고 있는 형편이 아닌가. 이날 목당은 인촌에게서 오늘 자신이 놓여 있는 위치를 새삼 확인하는 격이었다. 이 무렵 밖에서는 통일없는 휴전을 극력 반대하여 매일같이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목당은 광복동으로 나가는 일이 있으면 으레 나익진(羅翼鎭)을 불러내었다. 목당은 그간 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일체의 실무를 나 전무의 전결(專決)에 맡겨 협회를 운영하게 해오는 동안에 두 사람은 인간적으로 깊은 사이가 되었다. 목당은 자신의 신변의 일까지도 나 전무에게 상의를 구하고 그의 힘을 빌어 올 정도였던 것이다.
목당은 늙으신 부친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아낙이라고는 없는 살림이어서 무엇이든 간에 소일거리를 찾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나 전무를 불러내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궁리 끝에 합자로 무역회사를 차리기로 했다. 물론 나 전무는 협회를 그만두면서 퇴직금은 한푼도 받지 않았었다. 자신이 실무책임자이면서 자기 일을 처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던 터에 그가 겸임하고 있던 한국해태수출조합(韓國海苔輸出組合)에서 퇴직금 명목으로 그간 그가 거절해 왔던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챙겨주어 받은 것이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목당은 그에 해당하는 금액을 출자하여 합자회사(合資會社)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회사 이름은 합일기업(合一企業)으로 했다. 힘을 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천하시합위일(天下始合爲一)이라는 당서(唐書) 지리지(地理志)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러나 합일기업의 출자재산이란 100만원도 못 되는 것으로, 그런 영세자본을 갖고서는 무역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결국 이 회사는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무역회사를 차리기에는 목당은 너무 현실에 어두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