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한국 무역의 초기 무역시대(初期 貿易時代)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에서부터 1953년 정부불(政府弗) 불하로 수입무역시대(輸入貿易時代)가 개막될 때까지이며, 이 시기를 목당(牧堂) 이활(李活) 나익진(羅翼鎭) 팀이 한국무역협회의 운명을 맡았었음은 이미 본 대로이거니와 초기 무역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역업자들이 무역협회를 중심으로 무역로(貿易路)를 개척했다는 점과 무역협회는 회원 상사들로 구성된 임원회(任員會) 중심으로 운영되고 임원회는 충분한 토의의 자리가 되었다는 그리고 운영진은 실무를 충실히 이행하였다는 점 등일 것이다.
자원이 없는 나라가 유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역의 진흥에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협회 운영에 입국(立國)의 의지(意志)를 불태운 목당, 그리고 그와 의기투합하여 협력을 아까지 않은 일련의 인물들 - 동지로서의 오정수(吳楨洙) 전택보(全澤珤) 그리고 관에서 협회 발전을 도왔던 박충훈(朴忠勳)과 동업자인 나익진 - 이 초기 무역협회를 성공으로 이끈 인물들이다. 목당의 예견은 적중하여 뒷날 한국은 무역에 운명을 거는 나라가 되었고, 한국무역협회는 그 주역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커갔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개 업종단체가 이례적인 대기관(大機關)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협회를 이끄는 거물급 양식인(良識人)들과 수준 높은 회원 상사, 충실한 협회의 실무진(實務陣), 이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무역입국(貿易立國)을 구심점으로 단결함으로써 새 앞날의 무역시대를 여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랴.
이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목당은 1953년 4월 수입무역시대의 도래(到來)를 맞으면서 일단 회장직에서 물러서지만 1960년대에 다시 등장하여 줄곧 회장직에 있다가 종신하게 되니 말이다.
목당이 최초로 사회사업 같은 일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한국무역협회(韓國貿易協會)였고 그 협회와 더불어 일생을 바치는 외길을 걸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의 생활사전에는 사과와 후회라는 말이 없는 인물이었다. 유교를 통해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철리(哲理)를 깨우치고 그것을 신조로 했으며 영국의 신사도에서 장엄(莊嚴)과 신중(愼重)을 배워 몸에 지닌 사람이다.
목당은 협회에 몸담으면서 보수를 받은 일이 없고 공적 회합이 아니면 점심도 스스로의 지불을 어기지 않았다. 도학자적(道學者的) 길을 걸으면서 목당이 무역협회를 이끄는 데 추호의 사심과 편견도 드러내지 않은 것은 그의 고매한 정신세계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한국무역협회와 목당의 관계는 그가 무역계(貿易界)의 심부름꾼으로서 한국 경제에 특유의 체질을 조성하고 독특한 윤리성(倫理性)을 기업가에 미쳤다는 데 있다. 그리고 업계와 협회가 일체가 된 성장은 그 뒤에도 한국 경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는 데도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물론 뒷날의 일이지만 대자본가(大資本家)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全經聯)을 김용완(金容完)이 임원진 중심의 운영으로 이끌었던 것과 함께 목당의 무협 운영방식은 한국자본주의 발달사(韓國資本主義 發達史)에 하나의 주류를 조성했던 것이다.
목당의 서재에 걸린 편액은 ‘유천희해(遊天戱海, 하늘을 노닐며 바다를 희롱한다)’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다. 천의무봉(天衣無縫, 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자리가 없다는 뜻으로, 성격이나 언동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의 거침이 없는 처신을 멋으로 삼았던 것이 목당이며, 그가 한국무역협회를 이끔으로서 이 나라의 무역입국의 새 시대는 열려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