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로라월도 본사 사옥 전경[사진=오로라월드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브랜드 가치만 훌륭하면 생산품이 굳이 ‘메이드 인 코리아’일 필요는 없다.”
1992년, 노희열 오로라무역(현 오로라월드) 창업자는 미국에 A&A PUSH라는 현지법인을 설립, 앞으로 자체 브랜드 개발에 적극 나서겠다고 발표하며 임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관련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고, 고객사도 확보하지 못한 가운데 맨주먹 하나로 뛰어든 노 창업자는 미국 바이어를 수소문, 문전박대를 이겨내며 수 개월을 밤낮으로 졸졸 쫓아다닌 끝에 1500만 달러라는 초대형 계약을 따냈다. 첫 물꼬를 트고 나니 주문이 밀물처럼 들어와 늘어 2년 사이에 매출이 두 배로 급등하고, 4년 만에 기존 매출의 4배를 달성했다. 1990년 1월에는 첫 해외투자인 인도네시아 현지 생산 공장도 세웠다. 태평성대의 시기였다. 하지만 오로라월드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이어들은 납품기한을 맞출 수 없는 거대 물량을 주문하면서, 끊임없이 단가인하를 요구했다. 납품기한을 어기거나 단가인하 요구를 거절하면 거래를 끊겠다고 엄포를 놨다. 실제로 미국 바이어로부터 300만개에 달하는 제품 주문을 취소당할 뻔했다. 수개월 여 동안 바이어에게 사정을 해 간신히 결제는 받았지만, 노 창업자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OEM 방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또 절감했다. 뼛속이 사무친다는 표현이 그때만큼 와 닿은 적도 없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후반 들어 한국은 노동운동이 본격화 돼 근로자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노동 집약적인 완구 산업은 국내공장에서 생산하면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경쟁사들은 속속 동남아시아나 중국으로 생산라인을 이전했고, 노 창업자도 이를 검토했다. 하지만 기존 OEM 방식으로 해외에 나가봤자 당장은 괜찮겠지만 진출국가 역시 경제가 발전해 임금이 오르면 같은 위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노 창업자는 한국 본사에서 오로라월드 만의 독자 브랜드와 디자인을 개발하고, 제품은 해외 공장을 통해 생산하기로 마음먹었다. 10년 동안 오로지 남의 물건을 대신 생산해주던 업체가 하루아침에 고유 독자 브랜드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하나같이 우려의 목소리를 보내 왔고, 노 창업자 역시 망설였다. 하지만 고민을 거듭할수록 진짜 오로라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독자 브랜드 개발의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실은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성취감을 안겨줬다. 1995년에 ‘밀림의 왕자 레오파드’와 ‘오로라클래식’, 2001년에 ‘캐터필러’, 2004년에 ‘팬시팔스’ 등을 출시하면서 오로라월드는 서서히 힘을 발휘했다. 해외공장 직원들이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품질관리에 공을 들였다. 품질만 최고라면 굳이 ‘한국산’이라는 원산지 프리미엄을 안고갈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기발하고 창의적인 디자인에 최고의 품질력을 갖추면서 저렴한 가격의 제품을 지속적으로 출시한 오로라월드는 전체 회사 매출의 92%를 수출로 올리고 있으며, 선진시장에서 수출액의 85%이상을 자체브랜드로 판매하고 있다. 특히 미국시장에서는 오로라 브랜드인지도가 2위, 러시아 시장에서는 1위에 올라서는 등 한국 완구산업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일등공신이 됐다.
노 창업자는 “브랜드 가치를 키우는 것은 사실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하지만 기업의 지속성장을 위해서는 장기적인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현재의 매출액보다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