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人100言]장상태 “개인의 정열도 투자하라”

2016-07-14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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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낸 기업인들의 ‘이 한마디’ (122)

송원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사진=동국제강 제공]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투자를 할 때는 과거의 경험과 축적된 노하우는 물론 개인의 정열까지 모두 투자해야 한다."

송원(松園)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은 1995년 포항건설본부에서 임직원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그는 또 "투자를 할 때는 공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한다"면서 "설비, 생산, 건설, 영업까지 자기 손으로 해야 큰 경험이 된다"고도 했다.

송원은 생전 주변 사람들에게 “내는 쇠에 미친 사람인기라!”라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바늘에서 선박까지 철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는다’는 신조로 송원은 73년 인생, 자신의 모든 것을 동국제강에 투자했다.

1927년 출생한 송원은 서울농대를 졸업 후 농림부에서 공직 생활을 하다가 돌연 미국 미시간주립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1956년 부친인 대원(大圓) 장경호 창업자가 설립한 동국제강을 돕기 위해 29세의 나이로 전무로 입사했다. 이어 1964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포스코 설립자인 청암(靑岩) 박태준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철 생산의 초보적인 문제부터 제품화된 쇠의 공급(판매)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생기는 의문점이 날 때마다 송원에게 문의를 했다고 한다. 고향과 나이가 같은 두 거인은 평생을 친구로 지냈다.

동국제강은 대원이 설립했지만 실질직인 성장은 송원이 주도했다.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자 1971년 2월 국내기업 중 처음으로 후판사업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에는 무려 1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부산 제강소를 포항으로 이전시켰다. 내부의 반발이 거세자 송원은 “앞으로 조선산업 등이 성장할 텐데 이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1991년 준공된 포항의 1후판공장과 1998년 2후판 공장이 연이어 완성돼 연산 250만t 규모의 후판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

2후판 공장을 건설할 당시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동국제강의 경영난이 가중됐다. 이에 송원은 “지금 우리가 짓고 있는 새 공장에 우리 동국제강의 모든 미래가 걸려 있다"며 "공장 짓고 설비하다가 돈이 모자라면 마누라 반지라도 팔아다가 집어넣겠다"며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송원은 포항제강소 완공을 보지 못한 채 2000년 4월 4일 별세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국내 조선업은 대호황기를 맞았고 1994년 매출 9000억원 수준이었던 동국제강은 2008년 5조6000원 규모로 성장했다.

송원은 신념이 강하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진 기업가였다. 하지만 추진에 앞서 그는 늘 임직원들의 의견을 듣는 ‘합의 경영’을 실천했다. 이와관련, 그는 “결정이 다고 늦더라도 중지를 모을 경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 직원이 참여의식 고취와 일에 대한 자부심, 보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신속한 의사결정에 따른 장점을 취하지는 못하더라도 성급한 결정으로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최고의 철강회사를 꿈꾼 송원은 1998년 포항제강소에 “혼백이 되어서라도 기꺼이 달려와 동국제강의 수호신이 될 것”이라는 비문을 새겼다. 이 말은 동국제강인들의 마음에 깊이 인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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