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분단된 한반도는 모두 물자 결핍에 시달려야 했었다. 북쪽은 총발전량의 8할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중화학공장의 79%를 점하고 있었지만, 방직 등 경공업은 남쪽에 69%가 있었다. 북쪽은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재고자재와 시설까지 뜯어내 갔다. 이에 비해 남쪽은 미군의 원조·정크 무역과 마카오 무역 및 홍콩 무역으로 기초자재의 공급을 받아 그런대로 꾸려나갈 수 있었으며, 전력 부족만은 치명적이었으므로 남북교역(南北交易)은 남·북한이 다같이 원하는 바였다.
남북교역은 미군정이 처음 전기사용료 명목으로 전기동(電氣銅)과 생고무, 그밖의 일용품 등의 잉여물자를 주는 형태의 군정무역(軍政貿易)으로 시작하여 점차 민간무역도 허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남쪽은 북쪽과의 전력협정(電力協定)에 의하여 1945~1946년에 걸쳐 월 평균 5만kW, 1947년에는 6만3000kW의 전력을 공급받아 왔으며 단전이 단행된 1948년 5월 당시 소요전력 10만kW 중 7만kW를 공급받아 온 것이다. 이런 실정으로 겨울철의 전력 사정은 거의 암흑세계를 방불케 하는 고통을 안겨준 것이다.
전력대금(電力代錢)은 kW당 얼마에 결정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지불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47년 5월 7일 시멘트 54만 부대가 북쪽으로부터 입하되었는데 시중가격은 600원을 호가했으며 그 며칠 뒤인 5월 23일에는 비료(肥料)와 면직물(綿織物) 고무제품 등이 내려왔다는 신문 보도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전력대전으로 북쪽이 요구하는 물자를 공급하는 한편 물물교환의 바터무역이 군정 간에 이루어지고 있지 않을까 짐작할 수 있다.
아치발드 아놀드(Archibold V. Arnold) 군정장관(軍政長官, 해방 직후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한반도 북위 38도선 이남에 존재한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약칭 미군정청) 최고책임자의 관직)이 남북 간의 바터무역을 채택하겠다고 밝힌 것은 1945년 11월 13일이었으므로. “북쪽과의 무역은 통제품 외에는 자유”라고 밝히면서 정식으로 이를 허가한 것은 1946년 2월에 가서였다.
미군정은 남쪽의 쌀 부족에 직면하여 쌀 수출을 두려워한 나머지 통제품이라는 제한을 둔 것 같다. 1946년 상반기까지는 북쪽 왕래가 자유방임 상태였으며, 이를 틈타 생고무와 종이, 면제품 등 외국수입품까지도 북쪽으로 흘러들어 갔고 남쪽으로 들어오는 물자는 명태와 오징어, 카바이트와 비누 등이었다.
남쪽의 대북무역(對北貿易)은 제약이 없었던데 비해 북쪽은 대남무역(對南貿易)의 절차가 복잡하였다. 즉 이남에서는 상무국장 한승관(韓昇寬)이 발급하는 증명서 한 장이면 족했는데, 그 증명서란 품목과 수량을 기재한 다음 군정관의 도장을 찍은 정도였다. 38경계선의 군 검문소(檢問所)에서는 기재된 품목과 실제로 적재한 품목을 점검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북쪽에서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거기다가 심심치 않게 단전(斷電) 위협도 해오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1946년말 덕수궁에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면서 남쪽에서도 금지품목(禁止品目)이 늘어났고 군 검문소의 검문도 엄격해져 갔다.
남북교역은 육로(陸路)뿐이 아니었고 해상도 이용하였는데, 해상로의 민간무역은 묵호 세관과 포항 세관에서 검문했다. 이 두 세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사무역(私貿易)에 대해서는 약간의 벌금만을 물리고 세금은 받지 않았다. 한때 서울 마포에서, 명태 오징어를 실어 내고 있는 북쪽 배가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면서 정상적인 교역이 어려워지자 알선 역할을 맡고 나서는 브로커가 생겨나기도 했다.
북쪽은 이미 조선교역(朝鮮交易, 관영(官營) 형태)이란 정부 대행기관을 설치하고 남북교역의 창구를 일원화하고 있었는데, 남쪽에서도 이에 대비하는 조치가 요구되어 1948년 5월 13일 상공회의소가 상무부장을 상대로 제출한 건의서는 그간의 경위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근자 북조선 당국은 남북 경계선 일대에 56개소의 남북물자교역대행소(南北物資交易代行所)를 설치하고 물자 교역에 만전의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함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현하 남조선에 있어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 조직적인 방안이 없고 개인 상인에게 방임하여 단지 수 부(數 部)의 문서적 수속만을 밟을 따름으로 물자를 자유롭게 교역시키는 데 불과하므로 남조선의 중요 물자의 과대유출(過大流出) 또는 유입물자(流入物資)의 불균분배(不均分配) 등 실로 경제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국에서도 상술(上述)의 실정에 감(鑑)하야 급속히 남북물자대행기관(南北物資代行機關)을 지정 설치하심을 앙망하오며 겸하여 본회의소의 의견으로 제의하는 바는 차(此) 대행기관의 지정에 있어서는 상권(商權)을 상인(商人)에게라는 원칙에 의하여 어데까지든지 상인단체(商人團體)로 하여금 교역을 대행케 할 것이며 결코 관영(官營)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행기관에 관할자로서는 현 남조선에 있어서의 자타가 공인하는 정당 상인으로서 조직케 할 것을 건의합니다.’
상공회의소가 이러한 제의를 하고 나선 것은 북쪽이 대행기관으로 임하고 있은즉 우리도 대행 무역기관을 두되 스스로 참여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그 내용대로라면 북쪽은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북의 점령 소련군정 당국은 1947년 5월 25일 전력대전 500만 달러를 청구해 왔고, 이에 대해 미군정 당국은 6월 22일 대전 전액을 지불함과 동시에 ‘전력대금 지불에 관한 남북한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1948년 5월까지 남쪽에서 소비물자를 보내 주는 대신 북쪽은 전력을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력과의 대상물자에 대한 남북교역은 묵호·포항·해주·원산항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후 4월에 개최되었던 제2회 남북 전력협상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 이미 북쪽으로부터의 송전량(送電量)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으며, 1948년 5월 14일 정오를 기해 마침내 북쪽으로부터의 전력 공급은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단전에 앞서 미군정 당국에서도 북쪽이 요구하는 제2차 전력대가로서 전기기재를 비롯하여 대가의 35%에 해당하는 물자를 전달하는 한편, 40%에 해당하는 물자를 준비 적하하여 그들의 인수를 기다리던 중에 단전이 감행되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서 남쪽은 일시에 암흑세계가 되고 말았다. 이때 인도된 물자는 당시의 시가로 약 10억원에 해당하는 거액에 달하는 것이었으며, 추가 발송키로 준비한 물자의 시세 또한 10억원에 이르렀다.
생산공장들은 단전 전의 20% 전력밖에 사용하지 못했고, 따라서 가동률 또한 종전의 10~20%로 떨어졌다. 더구나 이때가 마침 이앙기(移秧期, 모를 내는 시기)이어서 연백평야와 김해평야 일대의 양수 작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았는가 하면 평택, 부천평야의 양수 작업도 차질을 가져와 이 해의 농사는 감수를 면치 못했다.
단전 이후 사실상 중단되어온 남북교역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이를 재개시키기 위한 획기적인 계획이 그해 11월 정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조치에 따라 앞서 언급한 화신무역의 앵도환이 교역물자를 싣고 이해 겨울에 북한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