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해방되던 1945년은 전례없는 대풍이었지만 식량 통제가 해제되고 공출제도 폐기되자, 굶주렸던 백성들, 특히 농가에선 마구 쌀을 낭비했다. 도시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예기치 않은 쌀기근을 맞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미군정 당국은 마침내 안남미(安南米, 인도차이나 반도의 안남 지방에서 생산하는 쌀)를 긴급 도입하여 배급하는가 하면, 외국에서 면포를 들여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쌀을 공출시키는 등으로 부심해야 했다. 그러나 절대량이 부족하고 보니 일본 중국 등지에서 귀환하는 동포, 그리고 월남해 오는 동포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전국을 헤매야 되는 지경이었다.
호남선 야간열차는 쌀장수들로 메워질 정도였고 서울역전에는 쌀부대를 실은 손수레와 마차로 줄을 이었으며 쌀장수 부녀자들이 북적대는 모습은 하나의 장관이었다. 1946년 연말의 일인데 러치 군정장관은,
하는 담화문을 발표하는 넌센스를 빚는가 하면, 신문들은 ‘칠면조 고기만 먹으란 말이지’라면서 꼬집고 나서는 등 나라가 온통 식량 소동으로 덥혔다.
식량난은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주요 식량 공급기지였던 한국과 대만을 패전으로 잃었을 뿐만 아니라 귀환일본인들의 증가에다 계속된 흉작으로 극심한 식량위기를 맞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쌀 반입자에게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기까지 했는데 그 같은 사정이 우리나라의 식량 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행정의 공백을 틈탄 상인과 어민들이 100t급 내외의 기동선 아니면 어선을 이용하여 남해안과 서해안에서 쌀을 만재하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일이 흔했던 것이다. 이들이 쌀을 넘겨주고 화장품·의류·학용품·의약품·기계부속품 등을 받아 오면 4~5배의 이익을 올릴 수 있었다.
당시 일본 세관을 통해 정식 통관된 쌀만도 연간 8만 석이나 되었으며, 밀수량은 그보다 몇 배에 이르는 실정이었다. 해방 후로부터 미군정에서 6·25를 치르는 시기는 한마디로 밀수 극성기였다. 물자 부족에 따른 현상이기도 했지만 대외 무역행위 자체가 변태적으로 행해져 무역업자의 대명사가 모리배였던 시기였다.
군정무역(軍政貿易)은 1945년에도 몇 차례 있었지만 중국의 정크선이 몰려들어 민간무역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46년 9월에 가서였다.
자립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군정의 일방적인 계획에 따라 물자교류, 통화유통, 해외여행 및 통신들이 이루어졌으므로 자주적인 무역이란 있을 수도 없었다. 1946년 1월 공포된 미군정 법령 제39호로써 대외무역규칙(對外貿易規則)이 처음으로 발표되었는데, 미군 사령관의 허가 없이는 다른 지역과 일체의 동산·부동산·채권의 거래 및 운반을 금한다는 내용으로써 대외무역이 완전히 군정청의 통제 하에 놓여 있었다.
대외무역은 면허제(免許制)였으며 거래 방법은 물물교환제였다. 해방 후 한국 무역이 처음 개시된 것은 1945년 9월 맥아더 사령부의 지령에 따라 한국의 소금과 일본 및 미국의 석탄이 교환된 것이었다. 이후 관영무역(官營貿易)은 일단 미국에 있는 미국 상사회사(USCC)의 손을 거쳐 교역이 되었다.
그때 일본에의 수출은 정부 수출 대행기관인 대한교역주식회사(大韓交易株式會社)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런데 1946년에 들어와 인천항을 중심으로 만주, 북지나 방면에서 일군(日軍)이 남기고 간 전시 물자를 털어 정크선에 적재하고 들어오는 중국 밀선이 날이 갈수록 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46년 5월 24일에 와서는 일시에 중국인 정크선 35척이 인천항에 들어와 항구를 메운 일도 있었다. 신문들은 인천항에 ‘무역선 운집’이란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미군정은 몰아닥치는 무역선을 앞에 놓고 우왕좌왕하는 형편이었고, 국내 상인들은 제멋대로 정크선 하주들을 상대로 거래하기에 바빴다. 마치 보물선을 맞아들인 것처럼 아우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