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서울에는 홍(泓)과 담(潭)이 각각 혜화동과 명륜동에서 살림을 하고 있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시골집에 칩거하면서도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의 교분을 위해 가끔씩 서울에 올라왔다. 설산은 목당보다 한발 앞서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현 고려대학교)에 몸을 담고 있었고, 인촌은 동아일보를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87~1945년. 교육가·언론인·정치가.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 역임)한테 맡기고 다만 보성전문 교장으로만 앉아 학교시설 확충에 몰두하고 있었다.
인촌은 1931년 8월, 1년 8개월 넘어 걸린 구미(歐美)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자 곧 보성전문을 인수하고, 1933년 9월, 오늘의 고려대학 교지(校地)인 안암동에 본관 신축을 시작하였다. 인촌이 구미 각지를 돌아보는 동안 가장 눈여겨 본 것은 곧 교육시설이었던 것이다.
그가 영국에 들렀을 때는 설산과 목당을 앞세우고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을 몇 번씩이나 찾았고 런던 대학 학생회관에도 자주 드나들었다.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학생회관에서 교수와 학생들 사이에 격의 없는 대화가 오가고····· 그것이 학문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서로 질문이 오감으로써 자연스러운 사제간의 친분이 맺어지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던 모양인지 그는 설산과 목당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는 소르본느를, 독일에서는 베를린, 하이델베르크, 체코에서는 프라하, 미국에서는 컬럼비아와 하버드, 예일 등 유명 대학들을 찾았고, 교육계 인사들도 만나는 동시에 시설을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그런 그였으므로 학교를 인수하자, 먼 장래의 대학원(大學園)을 생각하면서 우선 대학의 중심이 될 본관 신축에 착수하고 있었다. 공사가 끝난 것은 1934년 9월이었으며 학교도 곧 이사를 하였다.
목당이 귀국하여 인촌을 찾았을 때는 창립 30주년 기념사업으로 도서관을 건립, 막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을 무렵이었다.
한편 인촌은 도서관 건립을 전후하여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나서고 있었다. 개인적인 취미에서라기보다는 일본인들이 우리 조상의 얼이 담긴 귀중한 유산을 싼값에 사서 자기 나라로 반출해 가는 것을 목격한 때문이다. 인촌은 장차 우리의 후손에게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뛰는 귀중한 문화 예술품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하나 둘 사 모으기 시작했고, 그것은 앞으로 보성전문에 박물관을 세워 진열할 예정이었다.
그의 유럽 여행 때 프랑스의 루브르 박물관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에서 문화재를 아끼고 보존하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던 것이다.
목당은 오래간만에 찾는 설산과 인촌에게 빈손으로 갈 수 없었기도 하거니와 임고(臨皐, 경북 영천군 임고면)의 사과는 명품이기도 하여 몇 상자 기차 편으로 가져가 우선 설산과 인촌댁에 보냈다. 그러자 그날 저녁 설산과 인촌으로부터 당장 전화가 걸려 왔다.
“목당 언제 오셨소? 반갑군요. 영국에 갔을 때는 너무 신세가 많았소.”
인촌이나 설산 두 사람이 진정으로 반가워해 주는 데는 목당으로서는 가슴이 찡해왔다.
다음날 오후 동아일보사에서 만난 세 사람은 국일관(國一舘)으로 가서 오래간만에 대화했다. 우선은 서로의 상봉을 축하하는 이야기로 떠들썩하다가 차츰 화제가 학교 문제로 넘어갔다.
때마침 평안남도의 기독교계 학교들이 신사(神社) 참배 거부운동을 일으켜 마침내 도내 중고등학교 교장회의(校長會議)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는 보도를 놓고, 설산과 인촌은 앞으로의 험란한 역정을 심히 우려하는 것이었다.
목당은 인촌과 설산의 대화를 주로 들으면서, 그들이 참으로 신의(信義) 있는 훌륭한 지도자들인 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뒤에도 목당은 서울에 올라오는 길이면 꼭 설산과 인촌을 찾아보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그는 인촌을 따라 서화·골동품 수집에 취미를 붙이게 되었다. 물론 목당으로선 무엇인가 텅빈 가슴을 골동품 수집 취미로서나마 달래보려는 데가 없지 않았고, 값을 치러 주는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도 아들의 그런 마음을 헤아린 나머지 말없이 응해 주었는지 모른다.
목당은 서화는 물론 골동품에도 일가견의 안목을 지니고 있어서 그 감식력(鑑識力)이 정확했는데, 그의 이런 서화·골동품 수집 취미는 그가 영국으로부터 귀국한 뒤에도 그의 지식에 상응한 활동 무대를 갖지 못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허탈감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마음을 붙이기 시작한 것뿐이다.
목당은 자기 앞으로 되어 있는 재산이 없었으므로 그가 서화나 골동품을 사는 방법은 매우 재미있었다. 즉 그는 골동품 가게를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하면 아들 병인(秉麟)을 시켜 부친 석와에게 말씀드리게 하고는 대금도 병인이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가 수집한 것 가운데는 국보급(國寶級)에 속하는 것도 몇 점 있어서, 예컨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79년)의 기러기 10폭(幅) 병풍 같은 작품은 명품이었다. 이 병풍을 그가 손에 넣게 된 것은 원래 도상봉(都相鳳, 1902~1977년. 서양화가.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전 운영위원 등 역임) 화백이 소장하고 있던 이 작품을 간청하여 그가 소장하고 있던 완당(玩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년. 조선 말기의 문신·실학자·서화가)의 글씨와 바꾼 것이다.
당시 장안에서는 김수남이라고 하면 서화·골동품의 거간으로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목당은 주로 그를 통해 작품을 사들였으며 그밖에도 목당이 잘 드나들던 단골 골동품가게로는 金돌이집이 있었다.
이 무렵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 1893~1969년. 정치가. 수도경찰청장, 초대 외무부장관, 국회의원 및 국회부의장, 국무총리 등 역임)도 서화·골동품 수집에 열을 올렸는데, 보아두었던 물건을 사려고 가보면 어느새 목당의 손에 들어가 있고는 한다고 늘 투덜거렸다.
실제로 창랑은 목당을 향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나라 안에 있는 서화·골동은 모두 영천 이부자네 꺼지? 이부자네 재력을 따를 재간이 있어야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당은 서화·골동품에서 만은 남달리 집악을 보여 한번은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서화·골동품을 인촌이 일괄 흥정으로 인수하여 인촌·목당·동은(東隱, 김용완(金容完)의 아호. 인촌의 매부, 1904~1996년. 기업가. 경성방직 명예회장, 조선방직협회 초대 이사장, 한국경제인협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등 역임) 세 사람이 나누어 갖기로 하였는데 목당은 인촌과 동은의 몫에서 탐나는 게 있으면 으레 바꿔치는 것이었다.
화가 난 동은이 마침내 윽박지르고 나섰다.
“이런 욕심쟁이 보았나. 다 갖게. 다 가져!”
이런 집착으로 수집한 작품들을 목당은 송호정(松湖亭) 한 모퉁이에 새로 지은 장서각(藏書閣)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진열해 놓고는 스스로 감상을 즐겼지만 그가 돈을 가져본 일은 평생을 두고 없었다.
만석꾼의 장손이면서 자기 몫의 돈을 가져보지 않은 목당은 죽을 적에도 비과세(非課稅) 시민으로 죽었다. 서울 장안에서 거액납세자(巨額納稅者) 순위로는 18번에 드는 이부자집이었지만, 그 장손인 목당의 몫으로 되어 있는 재산은 따로 없었으니 이르는 말 그대로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로 살다 간 인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