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영국을 말하는 사람은 으레 그 사회는 더불어 믿고 살 수 있는 인간사회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이런 영국에 1932년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년, 정치가·교육자·언론인. 경성방직회사 창설, 동아일보 창간, 보성학교(고려대학교) 인수 등 활발히 활동했다. 2대 부통령을 역임)의 장남으로 일본에서 공부하던 일민(一民) 김상만(金相万, 1910~ 1994년. 언론인. 동아일보 사장·회장·명예회장을 역임)이 건너와 런던 대학 경제학과에 들어갔다. 외로운 유학생활에서 곁에서 동국인(同國人)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위안이 될 사정인데 말벗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찾아왔다는 것은 목당(牧堂) 이활(李活)로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모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몇 년 만에 런던 대학에만도 세 사람의 조선 유학생이 생기게 되었으니 고독한 일과의 연속이었던 목당으로서는 가족을 만난 것같이 반갑고 마음 든든하였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매일같이 5시 휴식시간만 오면 학생회관에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로 이국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김상만은 중앙고보(中央高普) 4년을 수료하고 일본으로 가서 주오대학(中央大學) 예과를 거쳐 학부에 진학했었지만 때마침 그가 속해 있던 비밀 독서회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도쿄 모도후지 경찰서에 한 달 가량 갇히는 몸이 되어 인촌은 아들이 석방되자마자 유럽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인촌이 영국을 택했던 것은 그의 구미 여행의 체험에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영국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검소한 생활과 예의 바른 몸가짐도 익힐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때마침 조부 동복영감(祺中公)의 별세로 고향에 와 있던 김상만은 1933년 11월 영국으로 떠나온 것이며 1936년 11월까지 3년간의 영국 유학 동안 사뭇 목당과 더불어 생활했다.
목당은 그보다 11세나 연상이었으나 그의 부친 인촌을 존경하는 선배로서 때로는 친구로서 사귀는 처지여서 김상만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목당을 찾아왔던 것이다.
근엄한 목당이었지만 그는 김상만을 마치 친동생처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러나 과묵하고 근엄하기는 목당이나 그나 마찬가지여서 이들의 런던에서의 사귐은 서로 주고받는 마음씀과 달리 허물없이 지내는 그런 사이는 되지 못했다. 마치 동양적인 군자지교(君子之交)라고나 할까, 그런 관계였다. 김상만은 영국에서의 3년 학업을 마치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1940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그러나 목당과 김상만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어서, 1941년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의 중매로 김상만의 누이와 목당의 장남 병인(秉麟)이 부부가 됨으로써 두 사람 사이는 사돈간이란 관계로 이어지는데 두 집안이 이렇게 결연(結緣)을 맺게 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은 그들이 영국 유학 동창이라는 인연 때문이었음은 물론이다.
1934년 김상만이 런던을 떠나버려 목당이 다시 외로운 객지생활로 되돌아가고 있던 때인 5월, 앞서 말한 김선기가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으로부터 날아와 런던 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하고 더욱이 목당이 체류하던 러셀 스퀘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토링턴 스퀘어에 하숙을 정함으로써 목당으로서는 다시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생활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선기는 호남 만석꾼 집안의 아들로 그 집안은 인촌가(仁村家)와도 왕래가 있던 사이였다. 그는 중국 베이징의 푸런대학(輔仁大學)을 거처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에서도 공부를 하고 특히 언어학 연구에 뛰어난 재질을 보였으며, 영어에 능숙할뿐더러 중국어·일어·불어 등 5개국의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정도였다.
목당이 그런 그와 조우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즉 하루는 학생회관에서 한 동양인 학생이 목당에게로 다가와 “이활 씨지요. 저는 김선기라고 하는데 소르본느 대학에 있다가 이곳으로 방금 옮겨 왔습니다”라고 말을 붙였던 것이다.
김선기는 그만큼 활달했고 구김새 없는 젊은이였다. 김상만과는 너무도 대조적일 정도로.
그들은 곧 친해져서 런던에 있는 동안 형제처럼 의지하고 지내게 되었다.
1935년 4월, 드디어 목당은 런던 대학교 경제연구학과를 졸업 학사학위(學士學位)를 받았다.
그 얼마나 긴 세월의 수입이었던가! 그러나 그는 졸업하였다 하여 당장 귀국할 마음은 없었다.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박사학위(博士學位)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목당은 갑자기 오른쪽 아랫배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왔다. 그해 여름은 무척이나 덥고 길었다. 잔병 하나 없이 건강하게 지내 오던 그로서는 참으로 난감하였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참을성이 많은 그는 이를 악물고 견뎌 내려 했지만 끝내는 신음소리 정도가 아니라 소리를 내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층에서 집주인 마담 부영이 소리를 듣고 뛰어올라왔다.
목당은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잡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마담 부영은 당황한 나머지에도 배가 어떻게 아프냐고 침착하게 묻고 있었지만 그는 그저 신음소리만 낼 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김선기에 연락해서 급히 그가 쫓아왔고 병원에 가자 급성맹장염(急性盲腸炎)이라는 것이 아닌가. 당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직까지 병원 신세를 져 본 일이 없는 목당으로서는 개복수술을 받는다는 것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었다. 한사코 수술을 거부하는 그를 설득하여 수술대로 보내기까지 김선기와 마담 부영은 진땀을 빼야 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고, 다음날 수업을 마친 김선기가 병실에 나타났을 때는 비록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목당은 말쑥하게 면도까지 하고 누워 “글쎄 금방 수술한 사람을 간호원이 강제로 면도하겠다고 달려들지 않겠소”라면서 정말로 화가 날 듯 투덜대고 있었다.
13세에 결혼하여 이미 아들까지 두고 있는 그임에도 스물 두 살에 신학문(新學問)에 입문한 이후로 줄곧 부인과는 떨어져 지내왔고, 완고한 유교사상에 젖어 있었던 탓인지 간호원의 손길이 자기 몸에 닿는 것조차 그는 불결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침대에 누워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던 목당이 불쑥 내뱉었다.
“죽어도 고향에 가서 죽고 싶군. 고향의 양지바른 솔밭에 묻히고 싶어.”
너무도 오랜 세월을 보낸 탓일까, 그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그해 11월 귀국길에 오르고 말았으며, 김선기는 홀로 남아 학업을 마친 다음 귀국,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현 연세대학교) 영어교수로 부임했다.
목당은 김선기가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자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굳이 영천의 송호정(松湖亭)을 찾도록 초청하여 그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의 우정은 그 뒤로도 평생 동안 그대로 계속되었다.
그밖의 영국 유학생으로 목당이 만난 사람으로는 신성모(申性摸, 1891~1960년. 정무직 공무원. 내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역임)와 윤보선(尹潽善. 1897~1990년. 제4대 대통령 역임)이 더 있다. 신성무는 목당보다도 8세 연상으로, 그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현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안희제(安熙濟, 1885~1943년. 독립운동가.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항일운동을 했으며 중앙일보사 사장 역임)가 설립한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 3·1 운동의 주역으로 등장한 청년 세대가 그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 독립과 민족 문화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안희제가 가난한 청년 인재에게 외국 유학의 길을 열어 주고자 1919년 11월 설립)의 장학금으로 영국에 유학한 사람이었다. 그가 영국에 온 것은 목당보다 훨씬 먼저인 1920년이었다.
기미육영회의 제1차 유학생으로 파견되었는데, 김정설(金鼎卨, 김범부(金凡父), 1897~1966년. 동양철학자이자 한학자. 소설가 겸 시인인 김동리의 형. 제2대 국회의원, 영남이공대의 전신인 계림학숙 초대 교장 역임), 이병호(李炳虎, 1926년 10월 일본 도쿄에 유학한 한국의 외국문학전공 학도들이 조직한 ‘해외문학파’ 동인)와 전진한(錢鎭漢, 1901~1972년. 정치가, 사회운동가. 제1·2·3·5·6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초대 사회부장관 역임)이 일본으로, 안호상(安浩相, 1902~1999년. 교육자. 초대 문교부 장관 역임)은 독일, 그리고 신성모가 런던으로 각각 파견된 것인데, 안희제가 경영하던 백산상회(白山商會, 1914년 안희제가 이유석·추한식과 함께 부산에 설립한 민족기업. 일제 탄압으로 1927년 폐업) 경영진이 육성회 곧 간사진(幹事陣)이기도 했던 기미육영회는 1927년 일제의 탄압으로 백산상회가 해산함으로써 함께 해산하게 되어 신성모에게 보내오던 장학금도 그 이후로는 중단되어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후일담에 의하면, 남의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는 목당도 신성모가 자주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해와 매우 난처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고 회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성모의 영국 유학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거니와, 해방 후 신성모를 통해 이승만(李承晩)의 의중이라면서 목당의 영국공사(英國公使) 교섭이 온 것도 모두 이런 그들의 유학시절에 맺어진 애환(哀歡)의 친분관계에서 온 것이다.
목당이 윤보선을 처음 만난 것은 해위(海韋, 윤보선의 아호)가 불쑥 런던 대학으로 찾아와서이고 두 번째는 1929년 인촌이 런던에 와서 우리 동포 유학생을 초대한 자리에서였던 두 번 뿐이었다.
목당은 영국으로 가면서 해위가 거기 애든버러 대학에서 이미 1921년부터 수업하고 있음을 듣고 있었지만 런던에서 에든버러까지는 상당한 거리였으므로 이국에 와서 공부하는 유학생으로서는 서로 쉽게 찾아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두 사람 모두 성격이 사교적이 못되었던 점도 일찍 만나지 못하게 된 데 작용하였으리라. 또한 해위는 당숙 윤일선(尹日善, 1896∼1987년. 의학자·교육자. 서울대학교 총장,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이 같은 에든버러 대학 의대에 와 있었으므로 그의 유학생활은 그리 외로움을 타는 생활도 아니었다.
그런 윤보선이 한번은 뜻밖에도 런던 대학 학생회관으로 목당을 찾아왔다. 스페인으로 학술연구 여행을 가는 길에 런던 대학에 조선 학생이 유학 와 있다기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런던에서 인촌이 베푼 초대에 참가한 후 곧 귀국해 버렸으므로 목당은 그와 사귈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성격 탓으로 서로 알고는 지내면서도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두 사람이 귀국한 다음에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