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런던 대학교 경제대학의 경제연구소에 입학수속을 하게 되고, 이렇게 하여 그의 10년간에 걸친 피땀 어린 면학은 시작된다.
그의 공부는 오직 경제학 연구에만 국한하지는 않았다. 인격 형성에 도움에 되는 모든 학문분야에 대한 관심도 그는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아서, 한때는 영문학에도 깊이 몰두했다.
목당의 암송 능력은 특히 뛰어난 바 있어서 일찍이 유년기와 청년기에 걸쳐 읽은 경서(經書)들도 주로 암송으로 그 뜻을 터득하는 그였으므로 그가 셰익스피어를 암송한 것은 그런 과정을 통해 셰익스피어의 말뿐만 아니라 영어 터득의 실력도 쌓은 이중의 효과를 얻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목당의 런던 대학 유학생활 10년을 대체로 2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첫 반기(半期)는 수강(受講) 준비를 위한 영어 학습기이고 다음 반기는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학위과정(學位科程)을 이수하는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영국에서 전문교육을 받고자 하는 외국인은 영어 실력이 충분하지 않은 경우는 강습소에서 배우거나 영어 교육만을 전문으로 하는 지도를 받아야 하는데 글방 공부에 익숙한 목당은 학비는 좀 더 들지만 진척이 빠른 개인교수, 즉 인스트럭터 쪽을 택하였다.
이 시절에 그는 주로 셰익스피어의 4대비극 ‘햄릿’, ‘맥베드’, ‘오델로’, ‘리어 왕’을 탐독하였고 그 밖에도 훌륭한 문학작품이나 철학서(哲學書) 등의 교양서적들과 영국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공부함으로써 영어 실력의 향상과 함께 인격 함양에 도움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목당은 그 뒤로도 영국 생활 10년을 통해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목당이 적을 둔 경제대학의 산업경제연구과(産業經濟硏究科)는 실용경제학을 위해 신설된 학과로서 이 학과의 전공 필수과목 가운데서는 각국의 산업경제사(産業經濟史)가 특히 목당이 흥미를 가졌던 과목이었다. 그 이유는 이 과목을 통해, 영국의 경제 발전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앞으로 조국의 국민경제 미래를 그려 볼 수 있었던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저 유명한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는 스코틀랜드 출생으로 글래스고우와 옥스퍼드 대학에서 수업하고 에든버러 대학 및 글래스고우 대학에서 강의하지 않았던가. 그의 ‘국부론(國富論)’은 뒤에 많은 경제학설(經濟學說)을 낳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는 동시에 윤리학자(倫理學者)이기도 하거니와, 목당이 섭렵한 경제학자는 아담 스미스 말고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3~1873), 데이비드 리카르도(David Ricardo, 1772~1823)에 이르는 일련의 영국 출신 경제학자들로 이들의 저서를 그는 거의 외우다시피 하나하나 독파해 나갔다. 물론 그 가운데는 특히 흥미를 느낀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의 ‘자본론(資本論)’도 끼여 있었는데, 그가 흥미를 느낀 것은 마르크스가 그 저서를 쓴 데가 바로 런던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실이었다. 64세에 죽은 칼 마르크스는 생의 후반 34년 동안 줄곧 런던에서 생활했던 것이다. 저 유명한 ‘공산당 선언(共産黨 宣言)’이 나온 것도 런던에서이고 자본론이 나온 곳도 런던이었던 것이다.
그가 착취 본위의 자본주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만들고 그에게 무진장한 서적과 자료를 제공한 곳이 바로 런던이었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4~1947년. 언론인이자 정치가. 1920년 동아일보 초대 주필이 되었고, 1923년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 등과 ‘3·1신보’를 발간했다)이 ‘평화와 산업’이란 방대한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 런던 대학에 3년 동안 머물면서 연구한 것이 영국의 산업혁명에 관한 것이었는데 이때에 그는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많이 참고했다.
어쨌든 목당은 영국의 경제사(經濟史)나 경제정책에 대한 연구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영국이라는 나라는 국토의 면적으로나 인구로 봐서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가 없는 섬나라일 뿐 아니라, 특별한 자원도 없고 일조량(日照量)이 적어 농업이 발달한 곳도 아니었다.
그런 영국이 세계 제일의 국민총생산고를 자랑하면서 세계경제를 이끈다는 사실에 목당으로서는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런 영국 경제를 하나하나 분석해 들어가면 반드시 어떤 결론에 도달할 것이고, 그 결론은 조국의 경제부흥에 큰 도움이 되고 결정적인 열쇠가 될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해방 이후 그가 한국무역협회를 이끌 수 있었던 이론적인 토대는 바로 이때에 닦아진 것임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지만 목당이 단지 경제학에만 관심을 갖지 않고 유명한 정치학자인 해롤드 조셉 라스키(Harold Joseph Laski, 1893~1950)에 깊이 심취하였던가 하는 점도 모두 그가 조국의 앞날에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나 하는 부분과 관련된다.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 1872~1970)의 철학에도 많은 감명을 받았지만 라스키 교수의 정치학 강의는 그를 매료시키는 바 있었다.
라스키 교수는, 맨체스터의 유태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로 건너가 그곳의 맥길 대학에서 역사학을 강의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서 1916년부터 1920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였고, 1920년 런던 대학의 정치학 강좌를 맡으면서 귀국하였다.
목당이 그의 정치학 강의를 들을 때의 라스키 교수는 36세의 젊은 나이로 목당보다는 겨우 여섯 살 위였다. 당시 즉 1930년대 초는 대공황에 이어 자본주의 체제가 전반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는가 하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각각 파시즘과 나치가 등장하고 러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차르(러시아 황제)를 무너뜨리고 나서는 대변혁의 시기였다.
파시즘에서는 국가가 최고 가치의 주체라는 이념 아래 모든 개체는 오로지 국가에 봉사해야 하는가 하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가 국가의 절대권력 앞에 통제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국가주의 즉 일원적 국가론(一元的 國家論)을 라스키 교수는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국가 내의 여러 직능단체의 권한과 권능을 중요시하는 다원적 국가론을 주창하여, 국가를 위한 국가가 아니고 국민을 위한 국가만이 바람직하다는 민주주의 국가로의 확고한 이론을 펴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탁월한 명강(名講)은 1933년에 ‘민족주의의 위기로’, 또 1935년에는 ‘국가론의 이론과 실제’라는 저서로 출간되어 목당은 그의 강의와 더불어 이 저서들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확립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한편 이런 라스키 교수는 목당이 귀국한 뒤인 1936년에는 직접 노동당(勞動黨)에 입당하여 1949년까지 당 행정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정치활동도 하게 되며 ‘근대국가에 있어서 자유’, ‘유럽 자유주의의 발생’ 등의 저서를 내고 정력적인 활동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