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사람이 재산이다.”
수천(壽川) 정수창 전 두산그룹 회장은 생전 “기업·근로자·정부 등 경제주체의 의식구조를 고양시키는 일이 우리가 보다 빨리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창하며 사람에 대한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강(連崗) 박두병 회장은 광복후 적산기업이 된 소화기린맥주 관리지배인으로 취임했는데, 경성고상(서울대 경영대 전신) 은사인 이인기 교수에게 ‘쓸만한 젊은이’를 추천해줄 것을 부탁했다. 이 교수는 연강의 경성고상 9년 후배이기도 했던 수천을 추천했다.
자신의 생각을 가장 잘 알고 업무 추진력까지 겸비한 수천을 곁에서 본 연강은 일찌감치 그를 자신의 후계자라 여기고 경영자 수업을 시켰다. 기대에 부응하듯 입사 7년 만에 동양맥주 상무에 오른 수천은 6.25 전쟁후 폐허가 된 동양맥주를 정상화시키는 한편 양조기술 자립, 맥주의 원료인 맥아공장 가동, 세계 최고 수준의 와인인 ‘마주앙’ 탄생 등 수많은 일을 연강과 함께 해냈다.
하지만 전무로 승진 후 2년만인 1965년 수천은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삼성그룹 계열인 새한제지로 자리를 옮겼다. 수천은 후일 “보수적인 경영을 하는 박두병 회장 밑에서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성장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연강은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 뒤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결심했다. 이 때 연강은 ‘자본과 경영의 분리’를 실천하겠다며, 회사를 맡길 사람으로 수천을 선택했다. 삼성물산 사장을 맡고 있던 수천은 연강의 요청으로 4년간의 외도를 마치고 복귀했다.
1969년 12월 15일 수천은 동양맥주 사장에 취임하고 연강은 회장으로 직함을 바꿔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날은 재계 최초의 전문경영인 최고경영자(CEO)가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1973년 폐암을 얻은 연강은 그룹 회장에 수천을 앉혔다. 자신의 사후 그룹은 수천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한 것이다. 연강은 수천에게 “내가 다음 회장을 자네를 세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자네 다음 사장은 자네가 결정할 일이지, 내 의사를 쓸데없이 촌탁해서 결정해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연강 별세 후 수천은 10년여간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하며 두산그룹의 제2의 증흥기를 이끈 후 1981년 박두병 회장의 장자인 박용곤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하지만 1991년 페놀유출 사건이라는 사상 최대의 위기 상황이 벌어지자 정 회장은 다시 그룹 총수로 복귀해 상황을 안정화시키며 원로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수천은 한국 재계에 전문경영인 제도가 정착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한국의 대기업은 오너의 의지와 믿음, 전문경영인의 헌신이 결합해 시너지를 발휘하며 큰 성장을 이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