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송희 기자 = 아름답고 유려하면서도 거침없다. 박찬욱 감독이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아가씨’를 두고 떠오르는 말들을 정리하자면 그렇다.
6월 1일 개봉한 영화 ‘아가씨’(제작 모호필름 용필름·제공 배급 CJ엔터테인먼트)는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과 유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판이한 형색을 하고 있다. 가장 많은 대사를 하고 있지만 가장 시적이고, 섬세하면서도 거침이 없다. 우울하면서도 명랑하고, 적나라하면서도 비밀스러운 박찬욱 감독의 세계, 그 자체다.
영국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하였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야기를 여러 갈래로 나눈 뒤 색채를 달리했다. 그의 선택과 집중, 결정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았다.
- 다행이다. 걱정이 많았다. 여성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가장 걱정했던 부분은 정사장면이나 낭독회 장면이었다. 낭독회의 경우, 음란한 책의 내용이나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일부러 말하게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히데코의 담담한 태도나 상대를 얕보는 시선 등이 도리어 남성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
- 그렇다. 히데코가 그들을 다루는 태도는 이모와는 판이하다. 이모는 위축되고 순종적이라면 히데코는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자신이 주도하고 관찰하니 오히려 남성들이 위축되는 거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낭독회 도중 히데코의 얼굴을 정면 클로즈업 잡는 것이다. 연기를 마치고 난 뒤 히데코는 무표정하게 손님들을 바라보고 손님들은 당황해서 쩔쩔매는 모습이 재밌지 않았나.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낭독회 장면은 김민희의 일본어 연기가 그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 일본어를 지독하게 연습했다. 어쩌면 그 자신감이 그 장면으로 배어 나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한국어 대사였다면 이만큼은 아니었을 것 같다. 한국 배우가 한국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남의 나라말을 정복했다는 것이 큰 자신감으로 작용한 것 같다.
낭독회 장면의 변태들도 인상 깊었다. 그들의 취향이나 행동들이 워낙 독특하니, 연출하면서도 포인트로 삼고 싶었던 부분이 있었을 것 같다
- 변태들. 하하하. 글쎄…. 한 사람, 한 사람 개성을 부여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건 생김새가 굉장히 점잖고 멋진 소위 말해 잘 늙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인상들의 사람들을 캐스팅하려고 했었다. 변태라는 것이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굉장한 학술 모임이라도 갖는 것처럼 굴지만, 기껏 모여서 한다는 게 그런 거라니. 역겹고 우습지 않나.
소설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결말이 달라지기도 했는데 선택과 집중, 결정을 한 부분은 무엇인가?
- 2부의 뒷부분부터 달라진다. 사실 히데코의 어린 시절은 원작에서는 2부에 속한다. 그의 성장과정과 코우즈키의 정체를 알게 되고 이런 결말을 보고 싶었다. 이 영화는 ‘내가 만들고 싶었던 영화’라기 보다는 ‘이런 장면을 보고 싶었다’고 말하게 된다. 두 여자가 한 편이 되어 두 남자를 손도 안 대고 찌르고 처리하는 게 보고 싶었다. 순수한 쾌락의 정점에서 끝난다는 것도.
원작의 어느 부분에서부터 이런 결말을 생각하게 된 건가? 수난을 겪은 두 여성에게 이러한 결말을 선물하고 싶었던 건가?
- 이렇게 끝날 거라고 예상하며 책을 읽었던 거다. 하지만 결말이 다르더라. 그것은 그것대로의 재미가 있었다. 내 바람과는 달랐지만…. 물론 내 것이 더 좋다는 건 아니다. 더 단순하고 유치한 독자의 희망일 수도 있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 같은. 하하하.
전작과 다른 결말로 인해 두 여성 캐릭터가 더 진취적이고 강인해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근래 한국영화 중 가장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 같다
-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특히 숙희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멍청하긴 해도. 하하하. 나중에 둘이서 힘을 합쳐 두 남자에게 골탕을 먹일 땐 영리해지지만 어리숙한 구석이 있긴 하다. 아름답고 용감한 아이다.
숙희의 행동들이 앙큼하면서도 멋진 구석이 많더라. 요즘 말로 심쿵하는 장면들이 많았다. 감독님이 꼽는 히데코와 숙희의 심쿵 포인트는 무엇이었나?
- 숙희의 경우 백작의 거시기에 손을 대고 ‘애기 장난감 같은 X대가리 치워’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사실 내가 쓴 대사는 거기까지인데 그 뒤에 태리가 쿵쾅거리면서 떠나고 더러운 걸 만졌다는 듯 손을 털어버리더라. 통쾌하고 멋진 장면이었다. 또 히데코의 경우에는 코우즈키에게 백작을 선물로 바치면서 ‘억지로 하는 관계에서 쾌락을 느끼는 여자는 없다’고 말하는 모습이다. 또 백작에게 와인을 먹여서 잠재우려고 노력할 때도. 백작이 가슴을 애무할 때 무표정한 히데코가 정말 멋있더라.
개인적으로 ‘아가씨’의 두 여성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것은 동성애를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동성애를 다룬 영화들임에도 상대가 동성임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부터 늘어놓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하지만 히데코의 경우 남성을 좋아할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숙희에게 적극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더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그렇다. 히데코는 주변 환경 때문에 혹은 태어날 때부터 남자를 사랑할 수 없는 몸이었다. 그건 숙희도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에 끝단이나 아줌마는 백작을 보고 환하게 웃고 반기지만 숙희만은 아무런 동요도 없다. 사실 숙희의 독백으로 ‘다 그놈에게 사족을 못 쓴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난다고 생각해서 빼버렸다. 백작이 뭘 하더라도 엄청 무시하지 않나. 그런 걸 보면 확실히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게 맞다. 히데코와 숙희가 떠날 때도 백작은 노만 젓고 있지 포커스조차 가지 않지 않나. 초점을 줄 가치도 없는 놈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감독님은 백작의 캐릭터를 귀여워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백작의 최후, 그의 성기를 지켜준 것을 봐도. 존엄성은 지킨 느낌?
- 하하하. 그 장면은 여러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백작은 사실 사기꾼, 거짓말쟁이, 농담 꾼이다. 자조적인 농담을 시도한 거다. 알량한 자존심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마당에도 그게 중요하다는 것처럼.
히데코 역에 김민희를 숙희 역에 김태리를 캐스팅한 것도 완벽했다. 두 사람의 관계나 신분의 격차를 관객들이 받아들이기에 더 수월했던 것 같다
- 신인 두 명을 캐스팅하려고 했는데 어차피 극 중에서도 나이 차이가 꽤 있고 신분 차이도 있지 않나. 한 명이 스타고 한 명이 신인이라면 그 캐릭터의 격차가 관객에게 더 다가올 거로 생각했다. 커 보였던 격차가 해소되고 동등해지는 여정이 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출발할 때 (간격을) 벌려놓고 싶은데, 이런 캐스팅을 통해서 가능할 거라고 봤다.
그 격차가 연기에 있어서도 도움을 줬나?
- 물론이다. 둘이 보고 있으면 정말 웃긴다. 하하하. (박찬욱 감독은 직접 찍은 김민희와 김태리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대부분 김태리가 말을 걸거나 홀로 박장대소하는 사진이었다) 태리는 끊임없이 말을 걸고 귀찮게 굴고 민희 씨는 담담하게 받아들여 준다. 민희 씨가 안 놀아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건 아니고. 하하하. 잘해주려고 노력한다기보다는 담담하고 솔직하게 꾸준히 (태리를) 봐준다. 태리 역시 그런 민희 씨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