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신용을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해야 돼. 그리고 기업인은 누구보다 정직해야지.”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불렸던 송암(松巖) 이회림 OCI 창업자. 그는 생전 자식과 임직원들에게 항상 이 말을 전했다고 한다.
1917년 개성에서 태어난 송암은 14세 때 개성의 한 상점에서 무급 점원으로 출발해 국내 최대의 무역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근검절약과 신용제일주의’로 무장해 1937년 개성에서 포목도매상인 건복상회를 개업한 뒤 해방 이후 서울 종로에서 포목 도매상인 이합상회와 개풍상사를 설립, 본격적인 무역업에 진출했다. 개풍상사는 당시 수출 실적 1, 2위를 다투는 업체로 성장했다.
1955년에는 대한탄광을 인수했고, 1956년에는 대한양회를 설립했으며, 1959년에는 최태섭 한국유리 창업자 등과 서울은행(현 KEB하나은행) 공동창립에 나서기도 했다.
OCI의 전신인 동양화학은 1959년 설립했다. 이후 송암은 당시 불모지나 다름 없던 화학산업에만 매진했다. 그 결과, 동양화학을 무기화학과 정밀화학ㆍ석유석탄화학 분야에서 카본블랙과 핏치·과산화수소 등 40여종의 다양한 화학제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화학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01년에는 동양화학공업과 제철화학, 제철유화를 합병해 동양제철화학을 연간 매출액 1조원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송암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71년 석탑산업훈장과 1977년 산업포장, 1979년 은탑산업훈장, 1986년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으며 대통령 표창도 수상했다. 1986년과 1991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양국 간 경제외교활동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기사작위와 국민훈장을 받았다.
이 밖에도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한국경영자총협회 이사, 인천상공회의소 회장,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등 각종 경제단체에 활발하게 참여해 ‘경제발전 1세대’로서의 소임을 다했다.
송암은 ‘기업윤리’보다 ‘기업이윤’이 강조됐던 1960년대에도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을 몸소 실천했다. 대한양회 관리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그는 사내 경영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단설립을 강행해 3·1장학금과 3·1문화상을 제정했다. 2005년 6월에는 자신이 평생 모은 문화재 8437점과 자신의 아호를 딴 ‘송암미술관’을 통째로 인천시에 기증했다. 이 미술관의 소장 문화재들의 가치를 따지면 1000억원대에 이른다.
미술관 건립 당시 주위에서 인천이 아닌 서울에 세울 것을 권유하자 “내가 인천에서 뜻있는 사업을 시작했고, 여기서 성장해 지금에 이르렀는데 인천에 미술관을 세우는 것이 인천시민에게 보답하는 길”이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송암은 임직원들에게 “상식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중용처세’(中庸處世·부족하거나 지나치지 않으며 편중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라는 경구(警句)를 붓으로 직접 써서 회사 사무실마다 걸어 놓고 임직원들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터득하도록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