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진정한 기업인이라면 국가를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학록(鶴麓) 류찬우 풍산그룹 창업자는 민간기업인으로는 최초로 방위산업 참여를 선언하며 이같이 강조했다. 학록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권율 등 명장을 등용해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 서애 류성룡 선생의 12대손이다.
“사람이 먹기 위해서 살 수는 없어. 이 나라 사람이라면 조국을 위해 뭔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죽어야지”라며 “남이 못하는 일이지만 나라에 꼭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학록에게 방위사업은 자신의 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경북 월성군 안강읍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 최후의 저지선이자 격전지였던 곳이다. 학록은 호국의 정신이 깃든 이 곳이 탄약을 생산할 적임지라고 보고 1973년 안강공장을 세웠다. 소재에서 완성탄에 이르기까지 일관 생산체제를 갖춘 안강공장 덕분에 우리 군은 군용탄약을 신속하고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안강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제는 모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우리 손으로 우리 군의 탄약을 자급할 수 있는 자주국방의 첫걸음을 시작했다”며 크게 기뻐했다.
박 대통령도 방위사업이 민간기업 입장에선 이익이 박하고 정부와 군 등으로부터 관리를 많이 받기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위사업을 하겠다고 손을 들어준 학록에게 고마워 하면서 “왜 이 어려운 사업을 하려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학록은 “국가 상대의 방위산업에서 돈을 벌 생각은 별로 없다. 그저 자주국방에 일익을 담당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겠다”라고 답했다.
풍산은 방위산업의 전문화와 현대화를 위한 첫 단계로 탄약의 국산화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 소구경탄을 비롯 박격포탄, 곡사포탄 개발에 성공한데 이어 1975년 대공포탄, 1979년 직사포탄을 개발하면서 1980년대 초에는 군이 사용하는 전 품목의 탄종의 국산화라는 큰 꿈을 이룰 수 있었다.
풍산이 탄약제조사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탄약을 만드는 주재료중 하나인 동, 다시 말해 구리를 다루는 업체였기 때문이다. 안강공장에 앞서 풍산은 1968년 국내 최초의 신동 공장을 건설했다. 풍산은 현재 구리를 활용한 제품만 생산하는 전문업체로 남아있다.
이는 “한 가지에만 전력투구하다 보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다. 내가 시작한 일만큼은 세계를 쥐고 흔들 정도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학록의 전문제일주의 경영철학에 따른 것이다.
전문화를 통해 기술을 축적하고 좋은 제품, 첨단 제품을 생산하는 게 꿈이었던 학록은 부동산 투자 등으로 사세확장을 꾀하는 게 어떠냐는 주위의 권유에 “땅 살 돈이 있으면 기계 한 대라도 더 들여놔 생산에 전념하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