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사진=남궁진웅 timeid@]
아주경제 장슬기·문지훈 기자 =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 국책은행의 부실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상황에 다다랐다.
국책은행의 부실을 상각시키면 자본이 감소한다. 자본이 감소하면 자본건전성 비율때문에 부채를 줄여야 하고, 결국 대출을 크게 줄여야 한다. 이를 극복하려면 대규모 증자가 필요하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국회를 따돌릴 수단을 찾아야 했고, 결국 떠올린 게 '한국은행'이다. 중앙은행을 통해 자본을 확충하고 이를 '양적완화'라는 말로 포장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사진)가 최근 정부와 금융당국의 압박에 못 이겨 백기 투항한 배경이다. 이 총재는 그동안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재원 마련에 '한국판 양적완화'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전방위로 조여오는 압박에 결국 "필요한 부분은 지원하겠다"며 기존 입장에서 살짝 물러섰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표적을 정해놓고 전방위적으로 압박한다면 누가 버티겠냐"고 비난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부재정부 장관은 3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도 한은의 발권력 동원을 재차 강조했다. <관련기사 3면>
그는 한은의 발권력 동원을 전제로 '사회적 합의'나 '국민적 공감대'를 강조했다는 질문이 나오자 "국민적 공감대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발권력 동원에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한은의 입장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친 것이다. 한은의 산업은행 출자를 위한 산업은행법 개정에 대해서도 "필요하다면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도 이 총재에게 '한국판 양적완화'를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임 위원장은 "중앙은행이 국가적 위험요인 해소를 위해 적극적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며 한은의 산금채·수은채 매입 등을 통한 국책은행의 유동성 확보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한은의 개입 필요성은 사실 정치권에서 먼저 제안했다. 강봉균 전 새누리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은 "중앙은행이 인플레만 막는 역할을 하는 시대가 아니라, 다른 선진국처럼 경제가 가라앉으면 그것을 일으키고 금융시장에 돈이 막힌 곳이 있으면 뚫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측도 "기업 구조 조정을 활성화하기 위해 산업은행 등에 대해 선택적으로 유동성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며 한국형 양적 완화에 힘을 실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결국 기업 구조조정을 위한 재원 마련은 모두 한은에게 떠넘겨졌다. 하지만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은 부정적이다. 독립성을 지니고 통화정책을 펼쳐야 할 중앙은행의 기본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한은은 통화당국이기 때문에 물가나 전체 금융권에 위기가 왔을 때 지원을 하는 라스트 리조트(Last Resort)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은의 개입은) 통화정책에 대한 국제사회에서의 신용도가 사라질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한은의 정책 시행 타이밍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는 있어도 이를 외부에서 압박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금융권 관계자는 "비전통적인 정책을 동원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한은이 과거와 달리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있다"면서도 "다만 정부나 정치권 등 외부의 압박은 독립성 문제뿐만 아니라 정책의 실효성도 떨어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이주열 총재의 구체적인 결단은 오는 5일 귀국 후 윤곽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이 총재는 현재 아시아개발은행(ADB) 연차총회와 동남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방문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