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리후이펑(李慧鵬) 기자 = ‘씨앗조각(核雕)’은 복숭아씨, 살구씨, 올리브씨 등 과일의 씨나 호두에 공예품을 조각하는 중국의 민간공예이다. 송나라 때부터 기록이 있었고 명청(明淸) 시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 중 산동(山東)성 웨이팡(潍坊) 지역의 씨앗조각은 ‘북파(北派)’를 대표한다. 호두씨를 재료로 삼아 씨앗의 자연스러운 무늬까지 절묘하게 살려내면서 산수, 인물, 꽃, 새 등의 생생한 모습을 입체적으로 묘사한다. 또한 역사적 인물, 신화와 고사, 덕담, 도장을 새기는 등 사방 한 치에 불과한 작은 공간에 천지만물을 녹여넣는 공예의 정수가 바로 씨앗조각이다.
웨이팡 씨앗조각은 청나라 말기에 시작돼 지금까지 5대에 걸쳐 전수되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호두에 새긴 배(核舟)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소동파가 적벽을 유람할 당시의 배가 가장 전형적인 소재다. 명나라의 문학가 위학이(魏學洢)가 쓴 ‘핵주기(核舟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숙원(王叔遠)이라는 장인이 소동파, 불인(佛印, 송나라 때의 승려) 등 5명이 배를 타고 적벽을 유람하는 장면을 호두에 새겼다. 심지어 배 안에는 8개의 창문과 돛, 노, 아궁이, 책, 염주까지 모두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34개의 글자까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는 점이다.”
세대를 거쳐 전승된 예술
1840년 1차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정치와 경제가 날로 쇠퇴해지자 황궁에 집결해 있던 최고 수준의 수공예 장인들도 무관심과 냉대를 받고 이리저리 흩어지게 되었다. 당시 장대안(張大眼)이라는 별호를 지닌 씨앗조각가도 경성(京城)에서 산둥성 주청(諸城, 현 웨이팡시 소속)으로 흘러들어가 조각을 팔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1915년, 도난계가 조각한 작품 ‘말이 끄는 고대의 이륜마차(馬拉古代轎車)’가 ‘1915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The 1915 Panama Pacific International Exposition)’에 출품되어 상을 수상하자 씨앗공예는 웨이팡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된다. 이후 도난계는 다시 씨앗공예 기술을 자신의 아들인 도홍영(都洪英, 두훙잉)과 사위 우학수(于學修, 위쉐시우) 및 수양아들 고공경(考功卿, 카오궁칭) 등 세 사람에게 전수한다.
이 세 사람 가운데 고공경의 배움이 가장 깊었고 실력도 가장 빠르게 늘었다. 1955년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웨이팡에 사람을 파견해 씨앗공예 장인을 물색하자 당시 정교한 기술을 갖췄던 고공경이 가장 먼저 추천을 받았다. 그 뒤 그가 조각한 서상기(西廂記), 홍루몽(紅樓夢), 팔준도(八駿圖), 녹학동춘(鹿鶴同春) 등의 걸작은 여러차례 국가의 외교선물로 쓰이게 되었다. 1962년 고공경은 웨이팡 공예미술연구원에서 일하게 됐다. 당시 연구소에서 동인(銅印)을 주조하던 왕서덕(王緒德)은 이 소식을 듣고 호두에 벼이삭과 메추라기 등이 묘사된 ‘세세평안(歲歲平安, 해마다 평안하시기를)’을 밤낮으로 조각하여 고공경에게 스승으로 모시고자 하는 뜻으로 선물했다.
왕서덕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처음 스승님은 곧바로 수락하지 않으시고 꽤 오랫동안 고민하셨다.” 고공경이 제자로서 왕서덕을 받아들일지 말지 여러차례 고민한 까닭은 씨앗조각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스스로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씨앗공예는 조각과 서예, 회화 등 여러 예술의 종합체이기 때문에 배우기가 몹시 까다로운 데 반해 성과는 빠르게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공경은 왕서덕의 집념에 감복하여 결국 그에게 씨앗공예를 모두 전수해 주었다.
자그마한 씨앗에 담긴 만물
예로부터 씨앗조각은 남과 북이 달랐다. 쑤저우(蘇州), 상하이(上海), 푸젠(福建), 광저우(廣州), 후베이(湖北) 등은 ‘남파(南派)’라 불렸고, 웨이팡, 랑팡(廊坊), 톈진(天津), 시안(西安) 등지는 ‘북파’라 불렸다. 이 두 파벌은 조각실력에는 별 차이가 없지만 사용하는 재료나 가공방법, 표현형식, 예술효과 면에서는 다소 달랐다. 남파는 세밀하고 우아함을 강조하는 반면 북파는 호방함과 운치가 두드러진다.
왕서덕이 조각하는 호두의 경우 큰 것은 달걀 만하고, 작은 것은 겨우 검지의 한 마디 정도 크기다. 중국에는 ‘참새가 작아도 오장육부는 다 있다(麻雀雖小, 五臟俱全)’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가장 잘 실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씨앗조각이다.
왕서덕은 <서상기화병(西廂記花瓶)>에서 호두를 화병 모양으로 만들어 그 위에 원(元)나라 잡극인 <서상기>의 줄거리 속 인물인 최앵앵(崔鶯鶯), 장생(張生), 홍랑(紅娘) 등을 새겨넣었다. <야유적벽(夜遊赤壁)>에서는 호두를 배 모양으로 만들어 각기 개성을 지닌 6명의 인물을 비롯해 자유로이 여닫을 수 있는 4개의 문과 8개의 창문을 새겼다. 돋보기를 들어 자세히 살펴보면 창문에 새겨진 40개의 글자도 발견할 수 있다.
<야유적벽>은 <핵주기>를 모방한 작품이지만, 작품 속의 시동(侍童)이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잠자고 있고 스님 한명이 고개를 하늘로 쳐들고 두 팔을 벌리며 하품을 하고있는 모습, 배 아래로 늘어진 닻 사슬, 머리카락처럼 미세한 쌀알 같은 40여 개의 고리 등은 원작보다 더 뛰어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왕서덕은 ‘핵주’에서 가장 까다로운 부분이 바로 닻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고리 하나를 새기면서 두번째, 세번째 고리를 신경써야 하기 때문이다.
미래를 담는 5대 계승자 왕서덕
세대를 거쳐 전승된 웨이팡 씨앗조각은 창의와 혁신을 거듭하며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정교한 세기의 걸작들을 여러 개 만들어 냈다. 2008년에 중국의 국가급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5대 전승자인 왕서덕은 국가급 계승자로 선정되었다.
각각의 호두조각 작품이 특출나고 정교해지려면 작가의 각종 능력을 모두 동원해야 하며 작품과의 ‘인연’도 필요하다. 왕서덕은 “익숙한 주제와 간단한 구조의 작품은 하루에도 몇 개씩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복잡한 것은 완성하려면 몇 날 며칠, 한 주, 심지어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야유적벽>이나 <백만웅사과대강(百萬雄師過大江)>과 같은 작품은 평생에 걸쳐도 한, 두 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왕서덕은 씨앗조각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지난 몇년 동안 후학들을 찾으며 무료로 강의를 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현재 왕서덕 문하의 제자들은 10여 명에 이르고 웨이팡에서 씨앗조각을 하는 예술가들도 50~60명에 달한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