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연구소를 세우자. 지금은 물건이 없어서 못 팔지 모르지만, 세월이 흐른 뒤엔 품질 좋은 물건이 아니면 못 파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연구소를 만들어 착실히 준비해나가는 것만이 기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다.”
1950년대 초부터 선진공업국의 여러 나라 대기업의 공장들을 시찰한 만우(晩愚)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자는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일찍부터 눈을 떴다. 선진 공업국이란 곧 기술력의 우위를 의미하는 것이요, 이들 선진 공업국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한 회사들은 모두 기술 개발력이 뛰어났었고, 독자적인 연구소와 이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시험공장을 가지고 부단히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1962년 효성물산으로 독자사업을 시작한 만우는 사세를 빠르게 확장해 나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마음속에는 늘 연구소를 품어왔다. 그리고 1971년 1월 안양공장 구내에 있는 2층 독립 건물을 개조한 연구동에서 기술계 사원 15명으로 구성된 국내 최초의 설립된 민간기업 연구소인 ‘동양나일론 기술연구소’(현 효성기술원)을 발족시켰다.
당시만 해도 기업이 연구소를 설립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결단이었다. 제품개발이나 신기술개발에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데 비해 연구개발 결과를 상업화해 성공할 확률은 대단히 낮았기 때문이다. 초대기술연구소장을 맡은 안태완 소장조차 만우에게 이를 이야기했을 정도였다.
이에 만우는 “연구소에 투자하는 게 기업 흥망의 ‘보험’이라고 생각하면 될 게 아닌가? 보험이 뭔가? 아프지 않고 사고가 나지 않으면 건강보험도 자동차보험도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만 그걸 믿고 보험을 안 드는 건 아니지. 언젠가는 다 쓸 일이 있어. 기업이 연구개발을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망하기 마련이네. 우리가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는가?”말했다.
제조업의 최우선 역량은 핵심기술이다. 핵심기술 중심의 사업 전개는 기술 축적이 곧 자산이다. 핵심기술을 포함, 응용해 신사업을 지속적으로 창출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시장을 개발하고 기존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 만우는 효성을 기술 중심의 회사로 만들고 싶었다.
기술연구소의 설립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한국 경제가 단기간 내에 급속도로 발전하자 초기에는 쉽게 기술을 제공하던 선진 공업국 기업들이 이를 꺼리기 시작했다. 다수의 국기업이 기술도입 실패로 애를 먹을 때 효성은 기술을 창조해 위기를 슬기롭게 넘겼다. 1978년 11월 정부가 나서 기업들에게 연구소 설립을 권장할 때도 효성의 기술연구소가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기술에 대한 만우의 의지는 1976년 설립한 동양미래대학교의 교시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금의 재산보다 낫다(積財千萬不如薄技在身)’에서도 엿 볼 수 있다. 만우의 사상이 이어져 효성은 현재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등 세계 1위의 제품들을 자체 기술로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