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기획-그레이트 코리아] 진념 “한국경제 60년은 ‘기적의 역사’…극복 못 할 위기는 없다”

2015-12-21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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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념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인터뷰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15일 서울 홍릉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본지 박원식 부국장 겸 정치부장과의 대담형식으로 1시간40분 동안 진행됐다. [서진=아주경제 남궁진웅 기자 timeid@]


(정리)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아니, 옛날 고리타분한 얘기를 뭐 들을 게 있다고…." 어느덧 백발의 어른으로 변했다. 하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만큼은 여전했다. '직업이 장관'인 진념 전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얘기다. 실제 그랬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동력자원부 장관, 김영삼 정부 때는 노동부 장관, 김대중 정부에선 기획예산처 장관·재정경제부 장관·경제부총리 등을 역임했다. 한국 경제의 영광과 질곡을 함께했다. 한국 경제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거침없는 입담에서 나온 진 전 부총리의 한국 경제 진단은 한마디로 폐부를 찔렀다. 특히 리더의 '발상의 전환'을 강조했다. 역발상과 상상력으로 위기를 정면돌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경제 60년사의 총 네 차례 위기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하면서 후세대에 지혜를 남겼다. 긴 겨울잠에 든 한국 경제에는 돌파구를, 청년들에게는 디딤돌을, 중·장년층에는 감동을 선사하리라. 진 전 부총리와의 인터뷰는 지난 15일 서울 홍릉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에서 본지 박원식 부국장 겸 정치부장과의 대담형식으로 1시간40분 동안 진행됐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다. 요즘 근황은 어떤가. 지난 11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강봉균 전 재정경제부 장관 등 전·현직 경제통과 함께 '코리안 미러클 3: 숨은 기적들' 발간 보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출간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한국 경제 60년사'를 담은 책이다. 5년 전 재경회(옛 경제기획원·재정경제원 등에서 퇴직한 관료들의 모임) 회장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에서 많은 학술기록과 연구자료 등을 출간했다. 그런데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독자 접근성이 없었다. 기록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독자들과) 소통하는 자료는 아니다. 쉽게 읽히는 자료가 필요했다. 읽히지 않는 자료는 의미가 없지 않나. 또한 한국 경제발전 60년사에 참여한 분들의 정책 결정 및 집행 등의 경험을 후세대에 남길 필요가 있었다. 그런 취지에서 시작한 것이다."

-한국 경제계의 산증인이다. 지난 1963년 경제기획원 사무관을 시작으로, 노태우 정부에서는 동력자원부 장관, 김영삼 정부에선 노동부 장관, 김대중 정부에선 경제부총리 등을 맡는 등 정부 노선에 상관없이 입각했다. 그 당시 시대상이 '코리안 미러클'에 담겨 있나.

"그렇다. 단기간에 경제 선진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있다. '코리안 미러클 1'은 해방 직후부터 1970년대까지의 경제발전상이다. 정책 추진 배경은 물론, 가장 중요한 집행 과정을 그렸다. '코리안 미라클 2'에는 1980∼90년대의 개방정책을 추진·집행한 정치인과 관료 등 경제·사회 원로들의 생생한 육성을 담았다. 최근 출간된 '코리안 미러클 3'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부터 새마을운동, 산림녹화 사업을 집중 조명했다. 한마디로 한국 경제발전 60년사다."
 

‘원칙주의자’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한국 경제 60년사의 총 네 차례의 위기 때마다 ‘리더의 발상 전환’과 ‘국민적 단합’으로 이를 극복했다”고 밝혔다. [사진=아주경제 남궁진웅 기자 timeid@]


-한국 경제의 산증인이 된 것은 그만큼 '갈등조정' 능력이 탁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평가에 동의하나.

"한국 경제발전 60년사 중 정부에서 40년간 일했다. 국민의 정부에서 외환위기 극복까지 했으니까…. 나는 행운아였다. 지역적 배경도 인맥도 없었다. 요즘 말로 금수저도 은수저도 아니었다.(웃음) 경제학을 전공하던 대학 시절,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 대학 4년간 하숙을 석 달밖에 못 했다. 대학교 4학년 때 고시공부를 했다. 사무착오든 운이 좋았든 마지막 고등고시(행정고시 전신)에 합격, 경제기획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토론이 자유로웠다. 사무관이 국장하고 밤샘 토론할 정도로 분위기가 자유분방했다.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대한민국 고등고시 1호인 김학렬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나를 키워준 분이다. 서석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도 마찬가지다. 기회를 준 정부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한국 경제는 그간 수차례 경제위기를 겪었다. 그 국면마다 위기 돌파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한국 경제사 60년의 첫 번째 위기는 언제였다고 보나.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62∼66년) 때다. 한국 경제사에서 잘 다루지 않는데, 난 대학 강의 때마다 꼭 이 얘기를 한다. 1963년 대선 때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윤보선의 표 차이는 불과 15만표에 불과했다. 그 정도로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자세한 설명 부탁한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국민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바빴다. 외국 원조를 받으면서 경제복구에 매진했다. 이른바 '수입대체 산업화 전략'에 치중했다. 그러던 중 1961년 5·16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섰다. 명분은 '빈곤 탈출'이었다. 이듬해 만든 게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다. 하지만 실패했다.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쌀농사도 잘 안 됐고 민정이양 문제도 있었다. 특히 민정이양 과정에서 미국과 상의 없이 추진하면서 한·미관계가 얼어붙었다. 통화개혁까지 실패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연평균 7% 성장률 달성을 목표로 했지만, 투자재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 국제수지 관리에 들어간 미국은 원조 차관을 줄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1963년 말 수정계획을 만들었다. 핵심은 '대외지향적 경제'다. 수출 제일주의와 개방정책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4년 하반기부터 쭉 개방정책을 폈다."

-드라마틱한 얘기다. 정확한 상황 인식과 그에 따른 정책 전환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사람이다. 정책 집행자의 추진력, 즉 리더십이 중요하다.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맨 처음 장군 출신 인사를 중용했다. 1964년 5월쯤 장기영 부총리(한국일보 시장)를 모셨다.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본 거다. 즉, '창의와 역발상'이다. 좋은 계획도 중요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집행력'이다. '장기영'이 누군가. 불도저식 추진력을 갖춘 사람 아닌가. 당시 장 부총리가 박 전 대통령에게 '경제내각 임명권'을 달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수용했다.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수출지향 전략을 본격화했다. 후임에 상공자원부 장관을 했던 박충훈 부총리를 임명했다. 이 분은 신사였다. 그런데 포항종합제철 건설 등의 추진이 잘 안 됐다. 돌파력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김학렬 부총리를 앉혔다. 기인에다가 머리가 면도날 같은 사람이다. 이 분을 중심으로 개발연대 사업과 수출지향적 정책을 추진했다.”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결국 사람이다. 정책 집행자의 추진력, 즉 리더십이 중요하다. 리더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진=아주경제 남궁진웅 기자 timeid@] / [기사정리=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결국 그 시대 상황에 맞는 인재 등용이 중요하다는 말로 들린다.

"맞다. 박 전 대통령의 적절한 인사 원칙이 한국 경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거 못지않게 감사해야 할 사람은 중국의 마오쩌둥(毛泽东)이다. (-무슨 말인가.) 마오쩌둥이 1964년부터 10년간 '문화 대혁명(중국 혁명정신의 재건을 위해 마오쩌둥이 주도한 극좌 사회주의 운동으로, 권력 재탈환을 기도한 권력투쟁)'을 하지 않았나. 당시 (중국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한) 덩샤오핑(鄧小平)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우리에게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노동집약적 생산구조로, 가발과 합판을 만들고 봉제를 하던 시기다. 대학원 등의 강의에서도 '중국 북경에 가면, 모택동 동상에 참배해라. 진짜 고마운 사람'이라고 한다.(웃음)”

-제2차 경제위기는 언제였나.

"1973년 석유파동 때다. 그때 경제기획원 물가총괄과장이었다. 1년도 안돼 원유가격이 배럴당 2달러 59센트에서 11달러 65센트를 웃돌았다. 세계 경제는 유가 폭등으로 '스태그플레이션'에 들어갔다. 100%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였던 대한민국은 거의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국제수지가 적자였다. 당시 우리보다 부유했던 북한은 뉴욕과 워싱턴 등지에 '자본주의 경제인 남한이 다국적 기업에 희생돼 완전히 부도났다'고 홍보했다. 서석준 부총리가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할 때다. 우리는 긴급히 '대한민국은 외국에서 빌린 차관의 원리금 상환 능력이 건실하다'는 반박 자료를 만들었다. 1974년 김영환 재무장관이 국제통화기금(IMF) 총회에 갔다. 나는 당시 물가총괄과장을 거쳐서 자금계획과장으로 있었다. 우리는 에너지수급 중장기 전망 등의 내용이 담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IMF로부터 1억2000만 달러의 특별인출권(SDR)을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한 편의 강의를 듣는 것 같다. 그다음 한국 경제위기는 언제였다고 보나.

"제3차 위기는 두 번째 오일쇼크였다. 1978년 배럴당 13달러였던 원유가격이 30달러로 치솟았다. 1979년 박 전 대통령 서거,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한) 12·12 사태 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했다. 전두환 정권은 '안정화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물가안정에 주력했다. 1986년 국제수지가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자력성장 시대를 연 것이다. 1987∼88년 땐 물가를 5% 이내로 묶었다. 경제성장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 그것은 대단한 성과다."

-마지막 위기는 1997년 말 IMF 구제금융 때인가.

"그렇다. 당시 300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금 모으기'에 동참했다. 이 같은 국민적 단합이 세계 금융기관과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등 주요 나라 지도자들에게 감동을 줬다. 저런 국민적 단합이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준 것이다. 여기에 4대 부문 구조개혁을 통해 경제체질을 강화했다. 그런 힘이 축적되면서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큰 충격 없이 극복했다. 네 차례 경제위기 때마다 우리는 주저앉지 않았다. 위기를 기회의 장으로 봤다. 국민들이 그만큼 지혜롭다. 결론을 내자면,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박정희도 DJ(김대중 전 대통령)나 JP(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사람을 고집하지 않았다. 인재 등용의 역발상이 중요하다. 역발상이 필수다. 여기에 국민적 단합이 결합하면, 극복 못할 위기는 없다. 말로만 위기 극복을 외친다고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니, 옛날 고리타분한 얘기를 뭐 들을 게 있다고…." 어느덧 백발의 어른으로 변했다. 하지만 카랑카랑한 목소리만큼은 여전했다. '직업이 장관'인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얘기다. 실제 그랬다. [사진=아주경제 남궁진웅 기자 timeid@]

 

진념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는 동력자원부 장관, 김영삼 정부 때는 노동부 장관, 김대중 정부에선 기획예산처 장관·재정경제부 장관·경제부총리 등을 역임했다. 한국 경제의 영광과 질곡을 함께했다. 한국 경제사의 산증인인 셈이다.  [사진=아주경제 남궁진웅 기자 timeid@]


 
[대담=박원식 부국장 겸 정치부장 / 정리=최신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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