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김현철 기자 = CJ그룹이 할 말을 잃었다. 집행유예를 기대했던 이재현 회장이 파기환송심에서 실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큰 죄를 짓고도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나는 이른바 '회장님 판결공식'이 깨진 것이다.
◆ 예상 못한 실형 선고
재판부는 "재벌 총수라 하더라도 법질서를 경시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해 조세를 포탈하거나 재산 범죄를 저지른 경우 엄중히 처벌받게 된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하게 함으로써 동일한 범죄의 재발을 예방하고, 건전한 시장경제질서 확립을 통한 진정한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고 실형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이 아닌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해 유죄 부분이 감축된 점을 반영해 일부 감형했다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2013년 7월 1657억원의 횡령·배임·조세포탈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는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유죄로 인정된 범죄액수는 1심에서 횡령 719억원, 배임 363억원, 조세포탈 260억원 등 1342억원, 항소심에서는 횡령 115억원, 배임 309억원, 조세포탈 251억원 등 675억원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이 올해 9월 이 회장의 일본 부동산 매입과 관련한 배임액을 구체적으로 산정할 수 없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을 적용할 수 없다며 이 판결을 파기해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에서는 조세포탈 251억원, 횡령 115억원 등 366억원이 최종 유죄로 인정됐다.
이 회장은 구속집행정지 기간이라 법정구속은 면했다. 재판부는 지난달 건강 문제를 이유로 이 회장 측이 낸 구속집행정지 기간 연장 신청을 받아들여 내년 3월21일까지 연장해줬다.
CJ 측은 "수형생활이 불가능한 건강 상태임에도 실형이 선고돼 막막하고 참담하다"며 "그룹도 경영차질 장기화에 따른 위기상황이 심화될 것으로 예상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모든 대안을 강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CJ 측은 대법원에 재상고할 예정이다.
◆ 총수 부재로 경영차질 '불가피'
CJ는 침통한 표정이다. 이 회장의 집행유예를 기대하며 인사, 사업계획 등 그룹의 모든 현안을 '총수 복귀' 이후로 미뤄왔지만 난처한 상황이 됐다. 성장이 멈춘 채로 또 2년 이상을 버텨야 한다는 우려가 그룹 전체에 퍼지고 있다.
지난 1996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될 당시 매출액 1조7000억원의 식품 기업에 지나지 않았던 CJ는 15배 이상 가파른 성장을 거듭한 결과 재계 14위에 올랐다. 그러나 이 회장이 부재한 지난 3년간은 성장이 주춤했다. 2013년 25조6000억원, 2014년 26조8000억원으로 4% 성장에 머물렀다. 올해도 답보 상태일 것으로 예상된다.
단기 적자를 감수해야 하는 해외 시장 개척이나 대규모 M&A 등 투자 집행 부분에서는 지난 2년간 이 회장의 의사 결정 지연으로 공백이 더욱 컸다.
CJ그룹은 2010년 1조3200억원, 2011년 1조7000억원, 2012년 2조9000억원 등 해마다 투자 규모를 크게 늘려왔다. 특히 2012년에는 외식 및 문화콘텐츠 사업의 글로벌 진출을 확대하겠다는 이 회장의 의지에 따라 당초 계획 대비 20%를 초과하는 투자를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의 공백 이후 투자 실적은 계속 줄고 있다. 2013년에는 계획대비 20% 미달한 2조6000억원, 2014년에는 21% 미달한 1조9000억원에 머물렀다. 올해는 계획조차 내놓지 못했다.
실제 동부산테마파크 등 수년 동안 추진해온 대형 개발 프로젝트가 잇따라 중단됐을 뿐 아니라, CJ의 성장을 이끌어왔던 M&A 역시 제자리걸음이었다.
특히 연초 CJ대한통운이 해외 진출을 위해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APL로지스틱스 인수에 실패하면서 오너 부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났다. 최고가 입찰 방식으로 진행된 APL로지스틱스 인수전은 신속한 의사결정과 과감한 지원이 필요했지만 오너 경영자가 없는 상황에서 CJ대한통운이 적극적으로 본입찰에 참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CJ가 최근 2020년을 목표로 세운 '그룹 매출 100조, 영업이익 10조' 계획도 빨간불이 켜졌다. M&A나 과감한 투자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 회장의 실형이 확정되면 CJ는 앞으로 2~3년간 변화를 최소화하는 비상경영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이 회장의 자녀가 아직 20~30대로 어리고 지분도 낮아 후계구도를 그리기에도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