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음악도 탁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명 대사들도 많이 나온다. 등장인물인 라인 지방의 한 처녀가 난쟁이 알베리흐에게 “황금이 바로 권력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손가락에 끼우면) 무한한 힘을 샘솟게 하는 반지를 라인지방의 황금으로부터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만이 세상의 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1972년에 공연된 뮤지컬 ‘카바레’에선 사회자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우리들은 가난해지자마자 돈이 세상을 돌아가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지갑에 5만 원권 지폐가 두둑하면 길을 걸어가도 뿌듯한 반면 지갑에 달랑 천 원짜리 한 장만 있으면 무언가 허전하고 마음이 편치 않다. 친구들을 만나도 돈이 있으면 소위 ‘생색’ 낼 수 있지만 없으면 ‘빈대’ 붙어야 한다. 돈이 있으면 페라리를 몰고 다니며 폼 나게 살수도 있다. 돈 때문에 직장을 옮기고 돈 때문에 인생의 방향을 바꾸고 돈 때문에 연인이나 부부간의 사랑이 끝나고 돈 때문에 각종 범죄가 발생한다. 칼 마르크스가 그렇게 혐오하던 것도 바로 (돈에 대한) ‘노골적인 이기심’과 ‘몰인정한 현금지급’의 ‘정서’(Ethos)였다.
그럼에도 살아가면서 돈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진다. 돈이 중심이 되다보니 행동이나 가치관 모든 것이 그쪽으로 쏠린다. 서로간의 믿음이 전제되어야 함에도 돈이 우선하는걸 자주 보게 된다.
돈이나 소비 행태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위치를 규정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명저 ‘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의 대상이 지위의 계층화를 만들어낸다고 했다. 소비대상은 가령 사람들을 고립시키지 않으면 차별하고 또 소비자들을 어느 한 코드에 ‘집단적으로 배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집단적인 연대’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소비한다는 한에서는 19세기 초의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무의식적이고 비조직적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들은 여론이라고 하는 훌륭한 사도로부터 어디에서나 칭찬 받고 아첨 받으며 또 찬양되고 있다.
후배 둘이 직장을 옮기려 한다. A는 현 직장보다 연봉 몇 백만 원을 더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 솔깃하다. 반면 B는 이직시 오히려 연봉이 낮아지지만 이전부터 자신이 하고 싶던 일이라 고민이다.
직업을 갖고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행위이기 이전에 또 하나의 자기 성취의 장이다. 만일 그것이 자신의 정서적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단지 돈을 버는 행위로만 그친다면 막스 베버가 말했듯 ‘직업으로부터의 소외’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이 기간이 길면 길수록 그는 직업을 갖고 경제행위를 함에도, 갈수록 직업으로부터 동떨어지고 퇴보하게 된다. 누군가 말했듯이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재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연봉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기가 정말로 잘할 수 있고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다시 말해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직장이라면 머지않은 시간에 그에겐 돈도 따라오게 된다.
21세기는 전문가의 시대다. 일에서 성취감을 얻는다거나 보람을 느끼지 못함에도 당장의 연봉에 만족해 그 자리에 있으면 결국 그는 특정 조직의 톱니바퀴의 일환에 불과한, 하나의 ‘힘없는’ 개체일 뿐이다. 반면 비록 지금의 연봉이 작아도 일 속에서 보람을 찾고 성취감을 얻어 그 분야에서 인정받는 ‘전문가’가 될 때 그는 더 이상 조직 속에서의 ‘힘없는’ 개체가 아니다. 주변에 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이 조직 저 조직에서도 그를 찾게 되는 것이다. 유능한 전문가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는 것도 이러한 이유들과 무관하지 않다.
돈에서 얻는 잠깐의 만족 때문에 인생이라는 긴 승부를 빨리 끝내려 하지 않았으면 한다. 보다 생생하게 살아있고 향기 나는, 그럼으로써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을 계발하고 보람을 찾는 일터와 직업을 갖는 것. 이것은 분명 돈보다 앞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돈도 자신을 따라오게 되지 않을까?
문화연예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