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연말까지 누적 부실 규모가 10조원에 달할 것이라며 한국 경제에 공포를 몰아넣고 있는 조선산업의 위기는, 그러나 우리 기업들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만은 없다.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업 자체적인 혁신 노력도 필요하지만 기업이 어느 지역에 가도 차별받지 않고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힘을 발휘해줘야 한다. 통상은 바로 우리 기업의 해외진출을 위해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또 다른 비즈니스다.
조선산업도 중국 때문에 업황이 더 악화됐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나왔지만 아직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새로운 혁신으로 기존 권리를 쥐고 있던 선도업체들을 따라잡는 것이 시장의 이치다. 그러나 중국 조선산업은 기업 자체의 능력보다는 정부 주도의 선박금융을 바탕으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선박금융이 사실상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는 절대 벌이면 안되는 ‘정부 보조금’ 성격이 짙다는 데 있다. 이미 우리 기업과 정부도 이 같은 점을 파악해 통상분쟁의 요소로 지목했다. 하지만 더 이상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 경제강국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 자국 산업을 고사시키는 또 다른 사례가 나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1% 선수금’이 미친 영향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고유가 사태가 지속되자 글로벌 오일 메이저들은 바다에서 원유와 천연가스를 채굴할 수 있는 해양 플랜트 발주를 크게 늘렸다. 상선 발주의 급감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조선 빅3가 일감을 채울 수 있었던 배경에는 2009~2012년 기간 동안 수주한 해양플랜트 및 관련 품목 덕분이었다. 해양 플랜트 신조 시장은 사실상 한국이 점유했다.
이런 가운데 2010년대 초반, 조선 빅3 가운데 한 업체의 플랜트 영업담당 직원은 오일 메이저 관계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중국 업체 관계자가 우리가 추진중인 플랜트를 자신에게 발주하면 선수금을 1%만 받겠다고 한다. 한국기업과 오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알려주는 것이다.”
오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알려준다는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안이 아니었다. 중국업체가 미덥지 않지만 그에 상응하는 조견을 우리 기업이 제시하지 않으면 중국기업과 손을 잡겠다는 통보였던 것이다. 이미 한국 조선업계는 중국의 거센 상선 수주몰이를 경험했다. 자국 해운업체들의 풍부한 일감 발주에, 지방 성·시의 투자로 한 때 100여개가 넘는 조선소를 만든 중국은 금융기관이 밀어주는 강력한 선박금융으로 해외 상선 수주시장을 싹쓸이 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0년 중국은 한국을 제치고 조선업계의 3대 지표인 수주량·수주잔량·인도량 모두 세계 1위에 올라섰다.
◆10억원만 있으면 1000억원짜리 드릴십 발주 가능
무엇보다도 선박금융의 파워는 강력했다. 수천억~수조원에 달하는 선박과 플랜트를 발주하는 선주 및 발주처의 입장에서는 단지 10억~20억원의 차이로 조선소를 바꾸지 않는다.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100% 수용하면서 최고의 품질의 제품을 정확한 납기에 건조·건설해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싸구려’, ‘저품질’이라는 인식 때문에 시장에 진입하기 어려웠던 중국 조선업체들은 자국 정부와 금융기관의 ‘물량공세’를 배경으로 수주몰이에 나섰다. 수주를 많이 하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다. 일을 많이 하면 기술을 쌓을 수 있다. 그 기술로 저부가가치 선박에서 고부가가치 선박과 해양플랜트를 건조할 수 있는 노하우를 쌓을 수 있다.
한국이 독점하고 있던 해양플랜트 시장을 들어오기 위해서 중국이 벌인 ‘1% 선수금 제안’은 발주처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1000억원짜리 드릴십이나 초대형유조선(VLCC)을 단돈 10억원만 내면 발주할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조선사는 곧바로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이전까지 해양 플랜트 수주는 한국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금 결제 조건도 좋았다. 하지만 중국업체 때문에 상황은 급반전됐다. 발주처의 제안을 무시하고 우리의 고집을 밀어붙여야 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결정 이후의 상항은 선박과 마찬가지로 해양플랜트도 가격이 급락할 것이라는 전망은 불 보듯 뻔했다. 더 큰 문제는 일감을 확보해 기술을 키운 중국업체들이 해양플랜트 시장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우려도 컸다.
이에 우리 기업은 수익을 악화시키지 않는 선에서 선주사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물량을 빼앗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치열한 협의 끝에 최종적으로 발주처와 합의해 받아낸 선수금이 전체 선가의 20%였다. 이 사건은 해양플랜트 대금 결제방식도 인도시에 50% 이상을 받는 ‘헤비 테일(Heavy Tail)’ 방식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됐다.
◆중국정부, 외투기업엔 선박금융 지원 금지
조선산업은 영업과 생산 금융이 어우러지는 종합산업이다. 최근처럼 수요(선사들의 발주 물량)에 비해 공급(조선소의 건조능력)이 훨씬 많은 상황에서는 선박금융이 수주를 결정짓는 핵심 역할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중국 정부와 금융기관의 선박금융 지원은 현지에 진출한 외국인투자기업에게도 동등하게 지원돼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가 우리기업의 해외사업을 가로막는 무역규제를 취합해 매년 발간하는 ‘외국의 통상환경’ 2014년판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2012년 1월 30일부터 시행하고 있는 ‘외상투자산업지도목록’을 통해 선박과 해양구조물 및 그 부품을 장려류에 포함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조선업체와 외자 조선업체를 차별하는 금융지원 제도를 두고 있다.
즉, 중국 정부는 중국 조선업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금융지원을 하지만, 외자 조선업체에 대해서는 신규 수주 프로젝트 신용보증을 위한 선수금환급보증(R/G) 제도에 있어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고 제작금융 대출조건도 보다 엄격한 기준을 적용(조선소의 중국측 파트너 지분은 51%이나 실질적으로는 67%를 적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국적에 따른 금융지원상의 차별은 외자조선업체의 사업을 어렵게 만들 뿐만 아니라, 금융기관을 통해 자국 기업을 간접지원하는 사실상 중국정부의 보조금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게 우리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2014년 11월에 회람된 외상투자산업목록 수정안에 따르면 선박 금융지원에 대한 제약은 변동이 없으나 합자 또는 합작 등 외자지분에 대한 제한조항이 기존 43개에서 11개로, 중국측 지분통제 조항 역시 기존의 44개에서 32개로 전체적으로 감소하면서 몇몇 선박 분야의 설계 및 제조도 포함됐다. 규제가 다소 해소됐다고 하지만 차별은 철폐되지 않고 있다.
우리 정부도 이러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중국 정부측에 시정을 요구하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중국과의 협의에서 목소리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중국발 시장왜곡 현상 해소해야
조선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자국 해운업체의 풍부한 발주와 금융기관의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과거의 전통적인 조선 강국이었던 유럽과 미국, 일본 등은 이러한 요건을 갖춰 성장했다. 반면, 한국은 이 두 가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오로지 해외시장을 두드리며 일감을 가져왔다.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 모든 프로젝트는 파산할 수 있다는 위기감(리스크)을 안고 뛴 도전의 역사였다.
이러한 조선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사업 환경을 개선시켜 줘야 한다. 우리만의 힘으로 부족하다면 WTO의 분쟁해결절차를 통해서라도 중국에서 비롯된 시장왜곡 현상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비롯된 ‘1% 선수금’ 사태는 지금 우리 조선산업의 부실을 만든 주범이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