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졸업 후 영화 연출 공부에 매진한 류 감독은 박찬욱, 곽경택, 박기형 감독 밑에서 연출을 공부했다. 2000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장편 데뷔한 그는 이후 ‘다찌마와 리’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 대작전’ ‘주먹이 운다’ ‘짝패’ ‘부당거래’ ‘베를린’ 등을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내달 5일 신작 ‘베테랑’(제작 외유내강·공동제작 Film K)의 개봉을 앞둔 류승완 감독을 27일 오후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났다. 류 감독은 “어제 잠을 잘 못잤다”면서 “개봉을 앞두면 언제나 긴장이 되는 것 같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도 언론과 일반 관객 시사회 후 평가가 좋아 기분은 좋은 듯 보였다.
“한 관객이 ‘베테랑’에 대해 분석한 글이 있더라고요. ‘다크 나이트’와 관련지어 쓴 리뷰인데, 영화에 ‘다크 나이트’ 텀블러가 나오거든요. 제가 ‘다크 나이트’ 팬인데다가 제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히어로가 ‘다크 나이트’거든요. 근데 그 분이 ‘배트맨’은 평소 재벌인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이 되는데, ‘베테랑’에서 조태오는 악당이 돼 있고, 브루스 웨인 역을 해야하는 사람들은 배기사(정웅인)같은 서민들이라는 거죠. 그래서 마지막에 배기사의 몸에 배트맨 그림이 있는 건 배기사의 아들이 보낸 메시지 같은 거라고요.”
“완성된 영화는 모든 과정에 존재한 의식적인 결과물이라고 볼 수 없죠. 무의식이 반영된다는 거죠. 감독 한 사람의 손길만 있는 것도 아니고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가죠. 집단 무의식도 있을 테고요. 한 경제학 박사님이 ‘짝패’에 대해 IMF 이후 경제 토건으로 읽으셨더라고요. 부동산 개발에 따른 공동체 의식의 파괴라고 하셨는데 말이 되더라고요(웃음).”
류승완 감독은 박찬욱, 곽경택, 박기형 감독에게서 자신이 완성됐다고 말했다.
“영화에 대한 태도는 박찬욱 감독님께, 연출 스타일은 곽경택 감독님께 배웠죠. 박기형 감독님 밑에서 ‘여고괴담’을 연출하는 모습을 봤을 때는 스스로 깊은 곳까지 몰아가면서 완성시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불행이자 행복인 게 동시대에 너무나도 잘 만드는 감독님들이 계시다는 거죠. 그분들의 등판만 보고 따라가도 바보 소리는 듣지 않겠다고 생각해요. 사실 영화로 경쟁을 한다는 건 말이 안되죠. 각자의 개성이 있으니까요.”
‘베테랑’은 류승완 감독의 개성이 한 껏 들어간 작품이다. ‘베테랑’은 한 번 꽂힌 것은 무조건 끝을 보는 행동파 ‘서도철’(황정민), 20년 경력의 승부사 ‘오팀장’(오달수), 위장 전문 홍일점 ‘미스봉’(장윤주), 육체파 ‘왕형사’(오대환), 막내 ‘윤형사’(김시후)까지 겁 없고, 못 잡는 것 없고, 봐주는 것 없는 특수 강력사건 담당 광역수사대에 대한 영화다.
오랫동안 쫓던 대형 범죄를 해결한 후 숨을 돌리려는 찰나, 서도철은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를 만나게 된다.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안하무인의 조태오와 언제나 그의 곁을 지키는 오른팔 ‘최상무’(유해진). 서도철은 의문의 사건을 쫓던 중 그들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직감한다. 건들면 다친다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서도철의 집념에 판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고 조태오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유히 포위망을 빠져 나간다.
“제가 황정민, 유아인을 캐스팅을 했다기 보다는 황정민과 유아인이 ‘베테랑’을 선택한 것이죠. ‘베테랑’은 배우들의 영화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감독, 각본, 제작, 그다음 주요 아티스트들이 나오는 게 보통인데, 이번에는 배우들 이름을 먼저 넣고 그 다음 제 이름을 넣었어요. 배우들에 대한 헌정이죠. 아주 정확한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해요. 적합했기 때문에 출연진이 화려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 누구 하나 빠진 연기가 없었죠. 고규필(순경 역)이 총소리에 놀라 쓰러지는 모습은 대본에 없었어요. 배우가 알아서 그 장면을 ‘먹은 것’이죠. 박소담(신인 여배우 역), 이동휘(윤홍렬 역) 같은 배우들이 출연해주면 감독은 50%는 그냥 먹는 거죠. 배우들이 연기한 것 중에 고르면 되니까요. 그래서 갈수록 캐스팅에 공을 들이는 것 같아요.”
류승완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감독은 축구감독과 비슷하다. 전략을 짜지만 그걸 시행하는 것은 선수들인 것처럼 영화감독은 배우들이 잘 연기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줘야한다는 것.
“유아인이 연기한 조태오 역할은 쉽게 캐스팅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너무 나쁜 역할이라 2~3군데 정도 대본을 보냈는데 거절을 당했죠. 연기 후 광고나 한류를 신경써야한다는 것이었죠. 조태오 역을 고민한 이유는 황정민을 상대할 수 있는 기운이 있어야한다는 거였죠. 관객들이 생각하는 악역에 부응할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어요. 우연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유아인을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했더니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시나리오를 보냈더니 ‘재미있게 읽어서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조태오는 유아인이 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이 나온 것이라 생가해요. 유아인이 연기를 했기 때문에, 약간 미성숙한 인물이 권력을 가졌을 때 천진난만한 웃음도 잘 표현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고맙죠.”
“한국영화의 규모가 많이 커졌죠. 영화 티켓을 사면 영화진흥기금이 포함돼 있어요. 저는 그 기금이 어느 정도는 영화 스태프들이나 시나리오 작가들, 무명 배우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봅니다. 최소한 생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혜택을 줘야한다는 거죠. 영화산업이라는 게 부익부빈익빈이 크죠. 젊은 예술가들 중에 재능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재능을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는 주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진위에서 그런 일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류승완 감독의 바람이 영화진흥위원회에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좋은 배우, 스태프, 작가들이 소개되고, 그래서 더욱 다양한 획기적인 연기와 작품들이 나온다면,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더 즐거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