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최서윤 기자 = 12일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 회의 후 나왔던 ‘유로존 정상들이 그리스에 회초리를 들었다’는 평가가 무색해졌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유로존 정상들은 그리스의 3차 구제금융 협상을 개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리스 국민들이 국민투표에서 '반대' 표를 던진 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혹독한 긴축안을 치프라스 총리가 유로그룹에 제출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그리스 국민들의 시름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스인들은 “국민국표를 왜 했는지 모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분노했다.
수년간 부가가치세 우대조치와 보조금 혜택을 받은 그리스 내 도서 지역 주민의 실망감은 더 크다. 새 긴축안대로라면 도서 지역의 부가세 우대와 보조금 철폐로 이 지역 주민과 외국인 관광객의 부담은 커질 수 밖에 없다.
아테네 중심가에서는 지난 10일 새 구제금융안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그리스는 식민지가 아니다”는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분석가들은 그러나 “새 구제금융 조건에 대한 반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들이 유로존에서 탈퇴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유로존에 남으려면 고통스러운 개혁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합의는 했지만...치프라스 국내 반발 직면
치프라스 총리는 채무 재조정을 얻어냈지만 부채 탕감(헤어컷)은 거부됐다. '금지선'으로 설정한 연금과 부가가치세, 노동관계, 민영화 등 4대 부문에서 굴복에 가까운 타협을 이뤄 집권당인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의 내부 반발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시리자 내 강경파인 '좌파연대'(Left Platform)는 지난 11일 3차 구제금융 협상 개시를 위한 개혁안에 대한 표결에서 17명이 지지를 거부해 치프라스 총리에 반기를 들었다. 40명 선으로 알려진 좌파연대 계열 의원들 가운데 찬성표를 던졌던 의원들은 유로그룹(유로존 재무장관 협의체)이 정상회의 안건으로 올린 협상안이 공개되자 모욕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따라서 협상 개시의 전제 조건인 부가세 간소화, 세원 확충, 연금 개혁, 민사소송 절차 간소화, 통계청 독립성 보장 등 7개 부문의 입법 처리를 앞두고 집권당의 분열이 예상된다. 치프라스 총리는 지난 11일 표결에서 지지를 거부한 장관 2명을 교체하고 표결을 시도할 것으로 전망된다
◇ 개혁안 수용 따라 디폴트 위기는 넘겨
어쨌든 그리스는 유로그룹이 요구한 개혁안을 전격 수용하기로 하면서 13일 유로존 정상회의에서 극적인 협상 타결을 끌어냈다. 치프라스 총리는 은행들의 파산과 그렉시트 위기를 넘기기 위해 ESM로부터 3년간 최대 860억유로(약 108조원)을 지원 받는 대가로 채권단이 요구한 강도 높은 개혁안을 수용했다. 치프라스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도널드 투스크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13일 새벽 유로존 정상회의와 별도로 회의를 열고 타협안을 끌어낸 것도 ‘그렉시트’ 파국을 모면하는 데 한몫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합의안이 요구하는 개혁 법안이 그리스 의회를 통과한 후에 유로존 각국 의회에 합의안이 상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스 정부는 지난 9일 채권단이 지난달 제시한 협상안을 거의 수용한 개혁안을 제출했다. 현지 일간 카디메리니에 따르면 그리스의 재정 지출 삭감 규모는 2년간 120억유로(약 15조1000억원)으로 알려졌다. 이는 지난달 말 채권단과 큰 틀에서 합의한 개혁안의 규모(79억유로)보다 40억유로(약 5조원) 이상 많다.
그리스는 개혁안에 임대소득세와 법인세의 세율을 인상하고,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0.25∼0.5%, 내년 GDP의 1%에 해당하는 절감을 이룰 수 있는 연금 개혁안을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2016년 말까지 섬 지역에 대한 부가가치세(VAT) 인하를 폐지하고 음식점에 대한 부가세율을 23%로 단일화하는 등의 부가세 개편 방안도 마련했다. 국방비 지출을 올해 1억유로, 내년 2억유로 줄이는 등의 예산 절감 조치도 시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11일 유로그룹은 여기에 더해 12개 항목의 개혁 법안을 제안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유로그룹이 이날 작성한 합의문 초안에 공개된 개혁법안은 ▲부가가치세 간소화 ▲과세기반 확대 ▲연금체계 지속 가능성 ▲그리스 통계청 법적 독립성 보장 ▲재정지출 자동 중단 실행 ▲송전공사 민영화 ▲부실채권 처리 ▲그리스 민영화기구 독립성 강화 ▲트로이카 그리스 복귀 등이다.
그리스는 앞서 지난 8일 유로존 상설 구제금융 기관인 ESM에 3년간 자금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그리스의 개혁안에 대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유럽중앙은행(ECB), 국제통화기금(IMF) 등 채권단 전문가들은 구제금융 협상을 재개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그리스에 대한 긴급유동성지원(ELA) 증액을 결정하면 그리스 은행들도 영업을 정상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채무불이행(디폴트) 위기도 넘기게 됐다. 기오르고스 스타타키스 그리스 경제장관은 협상 타결을 앞둔 지난 11일 “ELA 증액이 결정되면 은행이 일주일 내로 영업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