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 교수는 서·화가로 1990년부터 중국의 명승고적을 두루 꼼꼼히 보고 다녔으며, 1999년에는 노신미술학원에 교환교수로 재직하면서 중국의 유명 서·화가들과 교류를 넓혀 나갔다.
특히 만리장성 전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낙서에 감명을 받아 수 십 여 차례에 걸쳐 사진과 탁본을 해 그의 작품에 중요한 모티브로 활용했고, 운남성 나씨 족의 ‘동파문자’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2001년 1월에는 북경 중국미술관에서 ‘여태명 예술 실천’으로 성대한 개인전을 열고 중국미술관에 2점의 작품이 소장되기도 했다. 2008년 8월에는 북경 798예술지구의 9갤러리에서 ‘人+言’으로 개인전을 성공리에 마쳤다.
◇민족의 미학으로 추앙받는 ‘민체’
여 교수는 우리의 그림을 ‘민화(民畵)’로 부르듯이 한글이 반포된 이후 서민들이 사용했던 서체를 ‘민체(民體)’로 이름 지어 역사적인 배경을 정리함으로써 그의 작품들은 ‘민족의 미학’으로까지 추앙받고 있다.
일명 ‘여태명체’라고 할 수 있는 ‘민체’는 한글이 반포된 이후 일반 백성들이 편지 등을 보낼 때 쓴 글씨로 자유분방함, 그림이 글씨로 쓰이고 글씨가 그림으로 그려지는 듯 예술미를 갖춘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의 호를 딴 ‘효봉개똥이체’, ‘효봉축제체’ 등을 비롯해 컴퓨터용 한글 폰트를 개발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며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데 정진하고 있다. 이런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10월에는 (사)한국전문기자협회로부터 ‘캘리그래피, 문자예술가’ 부문 전문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에 걸린 ‘전주’ 현판에서부터 한옥마을, 막걸리집에 이르기까지 정겨운 우리 글도 눈에 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와 부산국제영화제의 글자체 역시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민체는 화장품, 인테리어 벽지 타일 등 모든 생활용품은 물론 심지어 막걸리집 정육점 간판까지 파고들었다.
◇전주 자만 벽화마을에 ‘한글미술관’ 오픈
전주, 서울, 북경, 심양, 파리, 베를린 등 동·서양을 넘나들며 15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여태명 예술실천 및 한글서예 10종’을 발간했다.
지난 3월에는 전주시 자만 벽화마을에 60여 년 된 한옥을 새롭게 고쳐 ‘한글미술관’을 오픈했다.
한글사랑이 남다른 그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문자 중의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돼 온 한글을 널리 알리고 서예문화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 이 같은 공간을 구상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한글미술관’에서는 어린 학생과 외국인 관광객,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글체험교육관도 운영한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중국미술관에서 초대해 개인전을 개최(2000년)하기도 했던 그는 한국 캘리그래피디자인협회 회장, 한국민족서예인협회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현재는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와 노신미술학원 객좌교수로 재직하면서 북경과 심양에서 작품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