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정치인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업인을 이용하여 불법 자금을 모금했으며, 무역업계도 이들의 손짓에 예외가 될 수 없었다.
6.25전쟁이 한창 벌어지던 1952년 6월 당시 이승만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중석의 대일 부정수출문제, 일명 ‘중석불사건’은 정경유착의 역사를 알리는 첫 부정사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중석불’이란 1950년대 당시 우리나라의 효자 수출품이던 중석(텅스텐)을 수출하고 벌어들인 달러를 말한다. 중석불은 일반에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기계류, 선박, 화물자동차 등 산업부흥자재를 수입하는 데만 사용하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구경할 수 없는 돈으로 ‘은행불’ 또는 ‘정부 보유불’로 불리기도 했다.
자유당은 이러한 우리나라 외환 시장 구조를 악용하여 1952년 3월 하순 재무부를 통해 대한 중석에 노동자의 양곡 도입용으로 중석불 20만 달러를 불하한 것을 시작으로 그해 6월말까지 삼호·미진상사·남한무역·영동기업·신한산업·보금장·고려흥업·남선무역 등 14개 상사에 각각 15만~20만달러의 중석불을 불하했다. 상사들은 불하받은 중석불로 밀가루 9940t, 비료 1만368t을 수입했다.
국무회의는 중석불로 구입한 밀가루와 비료, 쌀을 농림부가 지정하는 가격으로 지정된 지역의 농민과 노무자들에게 배급하기로 의결했다. 하지만 자유당 정부는 상사 측과 결탁해 도입물량의 80%를 상사가 자유 판매토록 했다.
밀가루의 경우 포대당 3만5000~4만원씩 광산 노무자에게 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시중에서 8만원씩 거래됐다. 업자들은 6000대 1로 중석불을 사서 보통 3만 대 1의 장사를 했던 것이다. 5배의 장사였다. 당시 세상에서는 중석불로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 500만원의 폭리를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수입가격의 5배나 비싼 가격에 판매하여 500여억 원에 달하는 부당이득을 취했다. 반면 전쟁 중 국내시장에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국민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의 조작으로 인해 비싼 돈을 내고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중석불 불하 대상 기업들은 당연히 정치권과 연결돼 있었고, 이들은 정부로부터 배정받은 중석불로 곡물을 수입하여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그렇게 번 돈은 다시 정치인에게 헌납되었고, 정치인은 이 돈으로 정치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중석불 불하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재선시키기 위해 대통령 선거제도를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헌법을 수정하면서 발생한 부산정치파동 직전에 일어났다는 점에서 여기에도 중석불로 벌어들인 돈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중석불 사건이 밝혀지면서 야당은 중석불 배분에서 국회의 동의절차가 생략돼 위법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정치문제화 했다. 국회의원 상당수가 상인과 결탁했다는 혐의가 포착되자 국회 조사단이 구성된다.
그러나 여당에서 벌인 사건이다 보니 조사는 형식적이고 미흡한 조사에 그치고 말았고, 오히려 자유당 정부는 “양곡 및 비료수급 계획상 불가피했다”고 변명까지 했다. 함인섭 재무부 장관만 인책 사직했을 뿐이고, 폭리 취득죄로 기소된 회사들도 1953년 5월 무죄선고를 받으면서 사건은 흐지부지하게 마무리 됐다.
이 사건은 한국 최초의 정치자금과 관련된 의혹사건으로 불리며, 정부의 외환배정을 둘러싼 정경유착의 초기 모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사건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외환배정의 불투명성이나 위법성이란 권력의 독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