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건국 1세대로 초대 재무부 장관과 한국수출입은행장을 역임한 '회남(淮南)' 송인상 한국능률협회 명예회장(효성그룹 고문)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101세.
1914년 강원도 회양 출신인 송 명예회장은 선린상업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과대학 전신)를 졸업했다. 준수한 외모와 탁월한 외국어, 풍부한 식견을 갖춘 우리나라 경제 근대화의 선도자이자 한국경제외교의 산 증인으로 ‘재계의 신사’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한국능률협회 회장을 20여 년간 맡아 기업가 정신 함양과 산업인재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여 왔다.
이후 주 유럽위원회(EC)대사(벨기에, 룩셈부르크 대사 겸임) 시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특명을 받아 경제외교에 주력해 유럽 수출을 3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끌어올림으로써 ‘기적을 만든 대사’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수출증대 경험을 높이 산 박 전 대통령에 의해 1976년에는 초대 수출입은행장에 임명되어 우리나라의 수출증대에 크게 기여했다.
송 명예회장이 경제관료로 활동하던 주요 시기는 6.25 전쟁 후 미국의 원조 속에서 산업화를 꾀하던 우리나라 경제사에 가장 우여곡절이 심했던 때였다. 원조당국은 원조자금을 주로 농업분야에 사용해야 한다는 네이산(Nathan) 보고서를 들고 나왔지만 당시 부흥부 장관 겸 경제조정관이던 송 명예회장은 공업에 투자해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그 결과 건설된 것이 충주 비료공장과 수력발전소, 디젤기관차를 도입한 철도 산업 등이었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과 원조당국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던 일화들도 유명하다. 구 조선총독부 건물인 중앙청을 정부청사로 쓰던 이 대통령은 민족적 수치라며 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자금도 기술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도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송 명예회장이 원조 당국에 쌍둥이 청사를 지어 나란히 하나씩 사용하자는 기발한 제안을 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민간 경제부문에 투신한 이후에는 동양나이론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태평양경제협의회(PBEC) 한국위원장 등을 거치며 산업발전과 국제경제교류에 앞장서 왔고, 20여년간 한국능률협회를 이끌면서 재계의 큰 어른으로 올바른 기업가상을 전파하고 한국 산업교육의 선진화에 힘썼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고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 등과 친분이 두터웠고, 남덕우 국무총리, 유창순 국무총리, 홍진기 법무부 장관 등 다양한 정관계 인사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눠왔다. 그중에서도 남 총리는 평소 자신을 ‘제2의 송인상’이라고 칭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고인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송 명예회장은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했고, 이보다 앞서 1991년에는 한미우호증진에 기여한 공로로 수교훈장 광화장, 2004년 한미협회 한미우호상을 받았으며, 국제 평화 증진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07년 국가 수반급에 수여되는 국제로타리 최고영예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송 명예회장의 타계는 우리나라 건국1세대의 마지막 증인이 사라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지난 2012년 발간된 평전 ‘어둠 속에서도 한 걸음을’에서는 그의 삶을 ‘가난한 조국에 다 바치고 싶었다’는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다. 이는 격동의 세월을 살아간 한 이코노미스트의 평생 염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라 할 것이다.
유족으로는 사업가 송동진 씨 등 1남 4녀가 있으며, 이봉서 단암산업 회장(전 상공부 장관), 고 신명수 전 신동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전 전경련 회장), 주관엽 씨(사업가)가 사위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 영결식은 25일 오전 6시 30분, 장지는 대전현충원으로 예정됐다.
<연락처 장례식장 02-2227-7550, 한국능률협회 비서실 02-3274-9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