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정교 분리의 원칙이라는 미명 아래 각종 사회 현안에 있어 기계적인 중립에 얽매이지 말고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라는 것.
18일(현지시간)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이날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방문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세월호 추모) 리본을 유족에게서 받아 달았는데 반나절쯤 지나자 어떤 사람이 내게 와 ‘중립을 지켜야 하니 그것을 떼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물었다”며 “(이에 대해) ‘인간적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말해줬다”며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키지 못했음을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적인 고통 앞에 서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며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와도 일맥상통한다.
한국 천주교는 세계에서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선교사의 도움 없이 자생적으로 수용돼 발전했다는 것과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하고 독재 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것.
천주교는 조선의 입장에서 외부 종교였다. 전 세계에서 천주교는 선교사에 의해 전파됐다. 이에 대해 선교사의 천주교 전파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에 도움을 줬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는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다. 선교사의 도움 없이 당시 조선인에 의해 조선에 들어왔고 확산됐기 때문이다.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온 18세기는 신분제도 등 조선 사회의 모순으로 인한 폐단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고 그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나날이 높아지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는 실학과 결부돼 실학자들에 의해 연구됐다. 천주교의 인간 평등 사상 등은 당시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으로 받아들여졌고 신분제도 등에 의해 고통받는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하지만 당시 조선 집권층의 입장에서는 천주교 확산은 체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것이었고 이는 대대적인 박해로 이어져 200여년 동안 1만명 정도가 순교했다.
이런 모진 박해에도 천주교는 서서히 뿌리를 내렸고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는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정교 분리 원칙에 입각한 기계적 중립이라는 방침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이 건국된 후 한국 천주교는 기계적인 중립에 머물지 않았다.
서슬퍼런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시절 한국 천주교는 제일 강력한 민주화 운동 세력으로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도 불사했다. 이것은 전 국민적 지지로 이어져 교세 확장에 큰 기여를 했다.
세월호 유족의 고통 앞에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에서 나오는 ‘중립’은 바로 고통받는 약자와 유린되는 인권에 침묵하는 것의 다른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