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시진핑의 칼끝, 왜 저우융캉이었나

2014-08-0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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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후 안전 위한 보시라이 연합이 자충수, 판단미스 스스로 몰락 앞당겨

2011년 전인대에서 함께한 저우융캉과 보시라이.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2010년 저우융캉(周永康)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의 고민은 '퇴임후의 안전'이었다. 2012년 11월이면 자신이 퇴임하고 시진핑(習近平) 체제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시진핑이 공산당 총서기에 등극한다면 강력한 정풍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예상은 2010년부터 심심챦게 나오고 있었다. 신지도부의 정풍운동 차원에서 ‘상무위원’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먹잇감임은 저우융캉도 잘 아는 바였다.

개혁개방이후 상무위원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묵계가 있었지만, 개혁개방 이전에 상무위원이 처벌된 전례가 있었기에 저우융캉은 안심할 수 없었다. 퇴임후 안전을 걱정하기는 다른 상무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나올 정치인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당시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배경으로 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다른 상무위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저우융캉은 퇴임후 자신을 비호해줄 원로세력이 없다는 것.

저우융캉은 장쩌민(江澤民) 주석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상하이방이 아니었다. 후진타오(胡錦濤)와 리커창(李克强)이 버티고 있는 공청단파도 아니었다. 덩샤오핑(鄧小平) 가문이나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 같은 강한 원로 정치인의 ‘라인’도 아니었다. 저우융캉은 상하이방 핵심인사이자 과거 교분이 두터웠던 쩡칭훙(曾慶紅)의 지원으로 성장해온 인물이다. 하지만 쩡칭훙은 시진핑을 차기 총서기로 등극시킨 킹메이커다. 그가 내세운 인물이 차기 총서기로 내정된 이상, 쩡칭훙으로서는 저우융캉을 비호해야 할 정치적 이익이 없어진 셈이다. 결정적인 순간 저우융캉을 버리더라도 시진핑의 손을 들어줄 것이 눈에 보였다.
 
◆운명적인 보시라이와의 연합

퇴임후 그를 보호해줄 원로가 없을 것임을 직감한 저우융캉은 자신의 후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 후계자를 차기 상무위원에 진입킨다면, 후계자가 상무위원회에서 자신의 보호막 역할을 해줄 것으로 여긴 것. 저우융캉의 눈에 띈 인물은 보시라이(薄熙來)였다. 보시라이는 능력이 출중하고 야심만만했다. 다만 본인을 내세우는 성향이 강해 당내 비토세력이 있었다. 당내 지원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저우융캉은 ‘퇴임후 안전’을, 보시라이는 ‘자신의 상무위원 진입 지원’을 매개로, 두 사람은 손을 잡았다. 저우융캉은 보시라이가 서기로 있던 충칭시를 자주 찾아 힘을 실어주며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2010년 이후 베이징 정가에서는 저우융캉이 정법위 서기 자리를 보시라이에 물려주려 한다는 설이 돌았었다.

하지만 2012년 2월 왕리쥔의 미국 망명기도 사건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보시라이는 궁지에 몰렸다. 보시라이 사태는 금새 국제적인 이슈로 떠올랐다. 보시라이를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안팎으로 높아졌다. 공산당 정치국은 물론 원로들까지도 보시라이의 처벌이 불가피함을 인정했지만, 저우융캉은 마지막까지 보시라이의 낙마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결국 보시라이는 직권남용과 비리혐의로 처벌됐고, 보시라이를 지켜내지 못한 저우융캉은 ‘부패정치인의 비호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저우융캉은 이후 정치력이 쇠약해 진 채로 2012년 11월 상무위원직을 퇴임했다. 퇴임후 안전을 위해 보시라이를 선택했던 수가 자충수가 되고 만 것이다. 정치적인 흠집을 남긴 채 퇴임한 그는 새로 들어선 시진핑 지도부에게 어찌보면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리춘청 전 쓰촨성 부서기와 악수하고 있는 저우융캉



◆쇠약한 정치력, 손쉬운 먹잇감

그리고 그가 퇴임하자 마자 화가 닥쳤다. 2012년 12월 그의 오른팔이었던 리춘청(李春城) 쓰촨성 부서기가 체포된 것. 이를 시작으로 이후 1년8개월동안 저우융캉의 옛 부하들은 모조리 체포되거나 낙마했다. 고위관료와 기업회장들만 34명이 체포됐다. 게다가 저우융캉의 아들, 동생들, 동생들의 가족, 부인까지 체포되어 조사를 받거나 기소됐다. 저우융캉 관련해서 모두 350여명이 체포됐다고 한다. 1년8개월동안 저우융캉을 타깃으로 한 ‘표적수사’가 진행된 셈이다. 끈질기고 집요한 수사에 상무위원의 처벌을 반대했던 원로그룹들조차도 입을 닫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난달 23일 중국 당국은 저우융캉의 조사사실을 공개했다.

공산당의 공식발표가 나자 중국 매체들은 일제히 저우융캉과 그 일가의 비리행위와 사생활에 관한 소문들을 앞다퉈 보도하고 나섰다. 저우융캉은 순식간에 중국인민들에게 부패의 원흉이 됐고, 시진핑은 과감하고 강단있게 전직 상무위원까지 내친 ‘정풍운동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했다. 시진핑으로서는 인민들의 지지와 공산당내 강한 리더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를 토대로 그가 계획한 개혁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태세다. 반면 저우융캉의 파란만장했던 정치인생은 비참한 모습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장쑤성 우시 시첸터우의 저우융캉 생가모습.

◆가난했지만 희망 넘친 시절

저우융캉은 1942년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의 시첸터우(西前頭)촌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저우이성(周義生)은 끔찍한 가난에 데릴사위가 되어 시첸터우로 이주했다. 시첸터우에 정착한 후에도 극빈생활이 이어졌다. 저우이성은 세명의 아들을 낳았고, 각각 저우위안건(周元根), 저우위안싱(周元興), 저우위안칭(周元青)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장남 저우위안건은 학업성적이 빼어났다. 1958년 지역명문인 쑤저우(蘇州)고등학교로 추천입학됐고, 이 학교에서 다른 학우와 이름이 같자, 저우융캉으로 개명했다. 저우융캉은 수학과 화학에 능했으며 성적은 줄곧 1위였다. 리더십이 있어서 반장도 독차지했다. 가난했지만 희망에 넘치던 시절이었다. 저우융캉은 사회진출후 자주 학교를 찾았다.

저우융캉은 베이징 8대명문 중 하나인 베이징석유대학에 진학했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7년 저우는 헤이룽장(黑龍江)성 다칭(大慶)유전 수습사원으로 발령받았다. 저우는 훗날 "대학졸업 후 베이징에 남을 수도 있었지만 국가가 가장 원하는 곳에 가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다칭유전은 겨울이면 당시 영하 30도가 넘는 날씨에 지하통로를 이용해 차로 2시간을 가야 시추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3년후 그는 랴오허(辽河)유전으로 이동해, 이곳에서 15년을 근무했다. 랴오허는 우리나라에 '요하'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저우융캉은 고속승진을 거듭했고 랴오허유전 석유탐사국 국장까지 올라갔으며, 유전이 위치한 판진(盘錦)시 시장도 겸임했다.
 

랴오허유전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저우융캉.



◆화려했던 고속승진

이후 1985년 국무원 석유공업부 부부장(차관)으로 영전해 베이징에 입성했다. 1988년 석유부가 국영석유회사들로 나눠지자 그는 페트로차이나로 자리를 이동했고, 1998년 페트로차이나 사장(장관급)을 물러나면서 32년 석유인생을 뒤로했다. 32년동안 석유업계에서 동고동락하며 다져진 네트워크는 저우의 든든한 정치자산이 되었지만, 지금은 모두 몰락했다.

1998년 저우융캉은 신설된 부서인 국토부의 초대 부장에 임명됐다. 그해 그는 중공 지도부들에게 편지를 써 서기동수(서쪽의 천연가스를 동쪽으로 운반해오는 계획)를 건의했고, 계획을 관철시키는 강한 추진력을 보이기도 했다. 1년후인 1999년 57세의 저우융캉은 쓰촨성 서기로 발령받는다. 그의 능력을 아낀 공산당 지도부가 그로 하여금 지방정부 경력을 쌓게 하기 위함이었다. 저우융캉은 자신의 비서출신인 지원린과 궈융샹을 쓰촨성에 데리고 갔다. 이 밖에도 쓰촨성에서 리충시, 리춘청 등의 새로운 휘하들을 만들었다. 이들 역시 현재 모두 체포됐다.
 

신설된 국토부 초대부장으로 임명된 저우융캉. [인터넷캡쳐]


◆드높아진 권력, 깊어지는 부패

저우융캉는 쓰촨성에 착임하자마자 현지 인민들의 게으름과 타성을 질타하며 강력한 경제개발 드리이브를 걸었다. 페트로차이나, 차이나모바일 등 대형 국유기업 회장들을 초청해 쓰촨성에 투자할 것을 설득해, 결국 투자를 유치했다. 쓰촨성 경제에 활력이 돌았지만, 그 틈바구니에서 측근들과 가족들은 축재를 했다.

강한 성격과 불도저같은 추진력을 높게 산 중공중앙은 2002년 저우융캉을 공안부장으로 임명했다. 공안계통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공안부장으로 취임한 후 그는 공안수칙 5개항을 발표하고 엄격히 수행토록 해 공안의 군기를 잡았다. 5개항은 음주운전을 하지 말며, 낮술을 금하라는 등의 간단하면서도 구체적인 행동지침이었다. 5개항을 필두로 공안부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조직은 쉽사리 장악됐다. 저우융캉의 권력은 드높아졌고, 그를 따르는 인사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와 함께 부패의 그늘도 짙어져만 갔다.

2007년 10월 17차 당대회에서 저융캉은 쩡칭훙의 지원을 받아 상무위원에 올라섰다. 그는 뤄간(罗干)의 후임으로 중앙정법위 서기직을 꽤찼다. 정법위 서기는 공안, 검찰, 법원, 무장경찰을 통할하는 막강한 자리다. 무소불위의 칼을 휘둘러서였는지 그에게 원한을 산 사람들도 많아졌다. 2009년 가을에는 그의 고향인 시첸터우촌에 있던 아버지의 묘지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상무위원시절인 2010년 10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손을 잡아보이고 있는 저우융캉.



◆마지막 순간, 모교를 찾아가서

2012년 11월 상무위원을 퇴임한 이듬해인 2013년 4월 그는 자신의 모교인 쑤저우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모교에서 그는 “세월이 흘러 세상이 변해 어떤 자리에 앉아 있고 어느 곳에 있더라도 나는 항상 모교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교를 들른 후 그는 곧바로 고향인 시첸터우촌을 찾았다. 그는 자신의 몰락을 예견하고 체념한 듯 촌민들에게 “아마 이번이 고향을 방문하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그 해 10월 모교인 중국석유대학 60주년 경축행사에 참석해 “석유대학은 내 인생의 시작점이었다”며 “스승과 학교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교방문은 저우융캉이 지난해 행했던 단 두번의 공식행사였다. 기율위의 조사가 시시각각 그의 목을 조여오는 상황에, 저우융캉은 모교와 고향을 찾아 때묻지 않고 순수했던 젊은 시절의 기억들을 되짚은 것이다.

◆멸문지화 저우융캉 형제

저우융캉의 가족들도 모두 화를 당했다. 저우위안싱, 저우위안칭 등 두 동생은 형과 달리 초등학교만 졸업한 후 집에서 농사일을 했다. 하지만 저우융캉이 입신양명한 후 두 동생들은 지역에서 위력을 떨쳤다.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에게 빰을 올려붙이는 등 거침이 없었고, 경찰들은 시첸터우 사람들에게 각별히 조심했다. 저우융캉이 쓰촨성 서기로 일하는 동안 큰동생 저우위안싱은 우량예(五粮液) 지역대리상 자격을 따냈으며, 작은동생인 저우위안칭은 아우디 대리상 판권을 취득했다. 가만히 있어도 재산이 쌓여갔다.

두 형제의 집에는 끝없이 손님이 몰려들었다. 저우융캉에게 잘 말해달라는 청탁방문이었고, 고관대작들은 두 형제에게 연신 몸을 굽실댔다. 당시 저우위안칭의 아우디차량 번호판은 ‘99999’였다. 다섯개의 9가 있다고 해서 지역내에서 ‘구오지존(九五之尊, 황제를 뜻함)’으로 불렸다. 화는 2013년 12월 찾아왔다. 경찰은 두차례에 걸쳐 저우위안싱의 집을 압수수색했고 가산을 몰수해갔다. 몰수이유는 ‘출처불명의 재산축적’이었다. 그는 지난 2월 암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초라했다. 그의 형제들과 조카들, 가족들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동생 저우위안칭과 그의 아내도 지난해 12월 체포됐다. 두 형제의 아들들도 권력의 그늘 아래 축재를 했으며, 현재 구속된 상태다.
 

2013년 10월 모교인 베이징 석유대학을 찾은 저우융캉. 당시 방문이 저우융캉의 마지막 공식행사다.



◆아들, 며느리, 부인, 처제까지

비슷한 시기 저우융캉의 아들 저우빈(周滨)과 며느리 황완(黄婉)도 베이징에서 체포됐다. 저우융캉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큰아들이 저우빈이고 둘째아들은 저우한(周涵)이다. 1972년생인 저우빈은 아버지의 보호아래 서남석유대학을 진학했다. 이 학교에서 맺은 친구들이 훗날 저우빈을 대리해 기업을 경영하며 온갖 특혜를 누리게 된다. 이들 역시 모두 체포됐다. 미국 유학시절 만나 결혼한 황완은 전 석유부장 황위성(黄渝生)의 딸이다. 둘째아들 저우한은 2000년대 초 아버지와 극심한 갈등을 빚고, 현재는 인연을 끊은채 지내고 있다고 한다.

저우융캉은 대학시절 학교동창인 왕수화(王淑華)와 결혼해 두 아들을 뒀다. 왕수화는 2000년경 의문의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 아내의 사망 후 저우융캉은 곧이어 2001년 28살 연하인 베이징대 출신 CCTV 기자인 자샤오예(賈曉燁)와 재혼했다. 자샤오예는 체포됐고, 자샤오예의 동생은 캐나다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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