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치솟았던 채권금리가 추락하자 일찌감치 배당으로 눈을 돌렸다. 이 덕에 갈피를 못 잡던 시장에 새 비전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곽태선 대표는 사회생활을 변호사로 시작했다. 변호사를 그만둔 뒤 증권사와 자산운용사, 투자자문사에서 애널리스트와 펀드매니저를 두루 거치며 증권맨으로, 사업가로 쉴 새 없이 변신했다.
곽태선 대표는 중학생이던 1970년대 초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간 이민 1.5세대다. 미 콜롬비아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으며,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왔다.
미 뉴욕 쿠데르브러더스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5년 동안 일했으며, 이때 증권관련 업무를 맡기도 했다. 곽태선 대표는 홍콩으로 건너가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했으며, 이곳에서 영국 베어링증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아 증권맨으로 입문한다.
증권맨으로 변신한 1980년대 홍콩은 글로벌 금융사가 앞다퉈 모여들면서 국제금융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 주식시장은 외국인에게 문을 열지 않았을 때다. 곽태선 대표는 이런 점에 되레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베어링증권에서 조사부 팀장을 맡아 한국 경제와 기업 분석을 담당했다.
곽태선 대표는 1992년 6년 동안 일했던 베어링증권을 떠나 지인인 정진호 전 푸르덴셜투자증권 대표, 손빈 전 액츠투자자문 사장과 함께 에셋코리아를 세운다. 당시 그는 집까지 담보로 잡히며 과감하게 사업에 베팅했다. 이후 외환위기를 비롯한 수차례 위기를 거치면서 동양투자자문과 합병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베어링자산운용이 관심을 보이면서 이 회사 한국법인으로 탈바꿈한다.
곽태선 대표는 다양한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에 대해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이민해 변화를 일찍 겪었다"며 "새로운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습관이 그때부터 생긴 것 같다"고 덧붙였다.
곽태선 대표는 옛것을 좋아한다. 우표수집이 취미다. 구한말 우표도, 홍콩 시절 수집한 중국 우표도 있다. 그는 "최근에는 값이 오른 덕에 재미도 봤다"며 흐뭇해 했다.
곽태선 대표는 "요즘 250여년 역사를 가진 베어링에 대해 쓴 책을 읽고 있다"며 "역사가 판박이처럼 반복되지는 않지만, 크게 보면 돌고 도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