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 둥지’의 첫 출발은 막장 드라마가 대부분 그렇듯 치정에 의한 것이었다. 가난한 남자 이동현(정민진)을 사랑해 그의 아이를 가진 부잣집 딸 백연희(장서희). 첫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며 행복해하던 날, 백철(임채무)이 둘을 갈라놓기 위해 딸을 강제로 끌고 갔고, 자신의 여자를 놓칠 수 없었던 이동현은 오토바이를 타고 쫓아 가다가 사고로 죽고 만다. 3년 후 백연희는 부친의 강요에 의해 돈과 명예를 가진 남자 정병국(황동주)에게 시집을 간다. 결혼식 당일 유산되면서 불임 판정을 받았고, 시어머니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았다.
여기까지가 35분 분량의 1회 내용이다. 16부작으로 녹여도 될 정도의 방대한 내용이 LTE급 속도로 전개됐다. 잠시 한 눈을 팔면 한 사람이 죽고, 다른 여자가 운다. 그야말로 막장의 빠른 진화다. 초반 캐릭터 설명과 극 전개로 상당 시간을 할애하느라 지루함을 느꼈던 일부 시청자에게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시청률 지상주의에 중심을 잃고 한쪽으로 쏠린 LTE급 전개는 내용을 곱씹으며 소화시킬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미지근한 대사와 느슨한 구성이 조금이라도 나오면 채널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지만 이건 심했다.
믿었던 도끼가 걱정거리로 전락할 우려도 있다. ‘인어아가씨’나 ‘아내의 유혹’에서처럼 극을 매섭게 끌고가던 배우 장서희가 첫회부터 힘에 부쳐보였기 때문. 물론 기우일 수 있다. 이제 첫 술을 떠 배부르다고 느낄 시간이 없는 데다 회를 거듭할수록 서서히 변하는 입체적 캐릭터이기에 지금부터 강렬할 필요는 없다. 다만 부정확한 발음, 밋밋한 대사톤, 부자연스러운 표정 등 외적인 부분의 미흡함이 극의 몰입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나와 장서희가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아 시동을 걸기까지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이 드라마는 첫 회부터 막장 코드로 점철됐음에도 ‘막장’이라 불리는 걸 꺼린다. 공영방송에서 내보내는 드라마이기에 자극적 소재나 전개를 지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곽기원 PD는 지난달 제작발표회에서 “이 드라마를 막장이라고 하는데 결과를 다보고 얘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깊은 내용이 들어간 드라마라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선을 그었다. 이날 취재진은 “최근 SBS는 드라마국에서 막장 드라마를 배제하려고 한다”고 지적하자 “KBS와 SBS 중 누가 더 그런 작품을 많이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느낌’이 아닐까”라며 막장 드라마에 손사래를 쳤다.
교통사고로 얼굴이 뒤바뀌며 인생이 변한 두 자매의 이야기를 다룬 ‘루비반지’가 막장 카드의 남발로 시청자로부터 욕을 꽤 먹었음에도 24.6%(1월1일, AGB 닐슨미디어리서치 전국 기준)라는 높은 시청률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 특히 ‘루비반지’는 지난 2008년 ‘돌아온 뚝배기’ 이후 5년 만에 부활한 KBS2 채널의 첫 일일드라마라 성과가 컸다. KBS는 ‘루비반지’에 비해 비교적 착한 드라마였던 후속작 ‘천상여자’가 최고 시청률 21.1%(4월 28일)로 3.5% 포인트 뒤쳐지면서 다시 한 번 자극적인 ‘뻐꾸기 둥지’를 내세웠다. 지난 2008년 막장 코드가 드라마 판을 뒤흔든 지 6년이나 지나 식상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한 방이 숨어 있다. 더구나 ‘루비반지’를 쓴 황순영 작가가 ‘뻐꾸기 둥지’ 집필을 다시 맡아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는 코드를 곳곳에 배치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