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 지난 천여년의 역사 속에서 한자(漢子)는 같은 한자 문화권인 한ㆍ중ㆍ일 삼국의 소통의 보루 역할을 담당해왔다. 일본의 다케다 마사야가 쓴 ‘창힐의 향연’이라는 책에는 16세기 서양 사람들이 중국의 한자를 처음 접한 뒤 바벨탑 이후 잃어버린 인류의 보편문자가 아닐까 하며 놀라워했다는 내용이 소개돼있을 정도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한자 사용인구는 무려 15억명,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사용인구 수로는 전 세계 공용어인 영어보다도 많다.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과거 마오쩌둥이 쓰기 불편한 한자를 개혁해야 한다며 로마자 사용을 기본으로 한자의 간략화 운동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오늘날 중국 대륙에서는 간체자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근대화 시기 한자를 폐지하고 서구의 알파벳을 도입하자는 주장까지 나왔던 일본은 오늘날 중국 간체자와는 상이한 일본 고유한 한문 약자 체계를 가지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나 대만 홍콩은 그대로 한자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국한 혼용’, ‘한글 전용’ 등 한자 존폐 논란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ㆍ중ㆍ일 삼국이 사용하는 한자가 서로 다르면서 비효율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한국인이 아무리 한자를 잘 알아도 중국에 가면 간체자로 된 간판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국 대륙인의 절반이 번체자를 읽지 못해 고대 역사서 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고, 한ㆍ중ㆍ일 각국이 사용하는 한자의 의미가 서로 달라 웃지 못할 해프닝이 발생하고 있는 것.
이 같은 언어의 이질성은 한ㆍ중ㆍ일 삼국간 협력에 장애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경제공동체를 일궈낸 유럽연합(EU)에서는 모든 나라에서 영어가 통용되고 24개 언어를 공식언어로 채택하고 있지만 각국간 언어의 이질성이 노동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해 시장 발전을 저해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따라 한자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1000년 이상 공유하면서 모두가 공동으로 만들어 온 아시아의 문화적 기호로써 중국의 문자가 아닌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문자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 동북아 지역 국가 간 인적 경제적 교류가 깊어지고 협력과 공존이 절실해 지면서 한자의 중요성은 종전보다 더욱 강조되고 있는 분위기다. 이러한 가운데 동아시아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삼국은 한ㆍ중ㆍ일 한자 통일 운동을 서서히 전개하고 있다.
지난 1991년부터 회원국간 상용 한자의 글자수를 제정하고 자형표준(통일)화를 추진한다는 목적 아래 한국이 중국ㆍ대만ㆍ일본과 함께 국제한자회의를 창설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난 2007년 열린 제8회 국제한자회의에서 한문문화권에 속하는 한국·중국·대만·일본의 학자가 자형(字形)을 통일한 5000∼6000자의 상용한자 표준자를 만들어 가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지난 해 7월에는 한ㆍ중ㆍ일 각계 저명인사로 구성된 '한중일 30인회'가 삼국 공통의 상용한자 800자를 선정해 발표했다. 3국 간 과거사·영토·정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아시아의 공유 가치를 확산시키고 세 나라 미래 세대의 교류를 보다 활성화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중일 30인회는 처음 800자를 시작으로 향후 제2차, 제3차 합의를 통해 공용한자 수를 늘려간다는 계획이다.
현재 한ㆍ중ㆍ일 공용한자 800자는 이미 한국어ㆍ중국어ㆍ일본어 버전으로 번역 출판됐다. 이 같은 한중일 공통 상용한자는 실제 비즈니스 현장에 도입되기도 한다. 최근 롯데마트가 대리급 이상 정규직 직원의 승진시험 때 한ㆍ중ㆍ일 공통 상용 한자 800자를 의무화한 것이 대표적이다.
공용한자 800자 선정 작업에 참여한 지바오청(紀寶成) 인민대 총장은 “한자는 한ㆍ중ㆍ일 삼국의 공동 자산으로 이번 공용한자 선정으로 삼국간 교류와 소통이 증진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장희구 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도 "공용한자의 선정은 잘한 일"이라며 "삼국 문자의 공통축이라는 면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첫 고비를 넘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