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100대 기업과 부자들> 상하이 자동차그룹 후마오위안 회장

2012-05-0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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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홍우리기자) 지난 십여년간 빠른 발전을 거듭해온 중국 자동차 산업이 최근 다소 주춤하면서 중국 로컬 자동차 기업 수뇌부의 거취 문제가 올초 수면위로 부상해 업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중 향후 행보를 두고 가장 많은 관심을 받은 이는 단연 상하이(上海) 자동차그룹의 후마오위안(胡茂元) 회장.

앞서 회장을 역임했던 천샹린(陳祥麟) 회장 등이 60세의 나이로 회사를 떠난 점 등을 고려할 때 후 회장 역시 지난 해 회사를 떠날 것으로 점쳐졌었다. 그러나 2011년은 지난 6년간 심혈을 기울여 온 전체상장이 결실을 맺는 때였다. 때문에 이러한 시기에 지도자를 바꾸는 것이 그룹 내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후는 회장직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전체상장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현재, 올 해 후 회장이 물러설 수도 있다는 추측도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 3대 국영 자동차 제조기업을 이끌고 있는 후마오위안이지만 그의 시작은 미약하기 그지 없었다. 1951년 상하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후의 가족은 판매원이었던 아버지에 기대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후 후 회장이 10살이 되던 해 집안의 기둥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더욱 고단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갖은 고생 속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후마오위안은 1968년 상하이 트랙터 부품 조립 공장에 취업했다. 머리가 타 들어갈 정도의 극심한 더위와 뼈를 파고드는 추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매일 낡은 자전거를 타며 집이 있던 푸둥(浦東)과 공장이 있던 훙커우(虹口) 우자오창(五角場)을 오갔다. 당시 일종의 견습생이었던 후가 받을 수 있었던 월급은 고작 17.84위안(한화 약 3200원).

15년을 하루 같이 부지런한 생활을 해온 후마오위안은 1983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대학 졸업장을 따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일개 말단 노동자에서 3000명의 직원을 책임지는 공장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 그룹 역사상 최연소 공장장의 탄생이었다.

공장장으로 부임한 뒤에도 후의 근면하고 절약하는 생활에는 변함이 없었다. 푸시의 9㎡ 남짓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온 후는 나무 판자를 세워 벽을 만들었다. 안 쪽은 장모에게 내주고, 자신과 처는 바깥 쪽에서 생활했다. 딸이 태어난 뒤에는 집안에 다락방을 만들고 두 부부가 좁은 공간에서 생활했다.

1995년 상하이시정부는 관리 인재를 선발해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교에서 비즈니스 관리를 공부하도록 했다. 이 때 상하이자동차공업총공사 부총재를 맡고 있다느 후마오위안은 경쟁을 통해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1년간의 유학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생활한지 3개월 만에 상하이시 정부는 급히 후를 불러들였고, 그에게 중요한 '사명'을 부여했다. 그룹의 책임자로서 미국의 GM과 합자회사 설립을 위한 담판을 지으라는 것. 당시는 중국 자동차 산업이 개방의 물꼬를 트면서 선진 기술 및 외자 유치가 붐을 이루던 때였다.

미국 자동차 업체의 대중 투자 중 최고 규모의 합자회사 설립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며 그룹의 영업 실적 또한 대폭 끌어올린 후마오위안. 후 회장은 이후 중국 자동차 업계의 새로운 신화로 떠올랐으며 지난 2002년부터는 그룹의 자주브랜드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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