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9월 1일 개봉하는 영화 '숨'은 '파수꾼' '혜화,동' '무산일기'를 잇는 2011년 한국영화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반응을 얻고 있다.
'숨'은 다르덴 형제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영화적 스타일과 깊이 있는 시선으로 신인 함경록 감독의 연출이 주목 받는 가운데, 실제 뇌병변 1급 장애인인 배우 박지원의 과감하고 자연스런 연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한 장애인 여성을 둘러싼 사회의 편견과 통념이 불러오는 아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섬세하게 매만져냈다. 논란과 충격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는 민감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안정된 연출력으로 완성했다는 평이다.
영화는 이미 개봉 전, 로테르담영화제를 시작으로 전주국제영화제, 바르셀로나아시아영화제, 후쿠오카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됐으며 브뤼셀유럽영화제 황금시대상, 시네마디지털서울 버터플라이상을 수상하며 검증된 작품성으로 관객들의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재능있는 감독 탄생'으로 주목받고 있는 함경록감독의 영화 제작과정을 들어본다.
▲영화 <숨>을 제작하게 된 배경은.
-영화 촬영이 없을 때면 영화 관련 수업을 했다. 중고등학생부터 노인까지 대상은 다양한데, 장애인 대상 교육은 <숨>을 제작하기 3년 전부터 시작해 지금도 진행하고 있다. 학생 대부분은 어려서 가정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자라다가 자립을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쓴 시나리오는 내용은 시설에서 겪었던 얘기들이었다. 주로 폭행으로 시작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들,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봐왔던 그런 것들이었다.
TV를 통해 본 것들이 워낙 충격적이어서인지 시나리오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은 오히려 덤덤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처음으로 장애인 시설 비리에 대한 얘기를 접하기 시작해 1년간 같이 영화를 만들어 가면서 느꼈던 것은 시설에서 벌어지는 커다란 비리에 비해 그 안에서 살던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늦은 저녁 배고플 때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싶다는 정도의 소박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덕분에 사소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떤 것이 하고 싶은지 그 안에서 금기시된 것을 이루기 위해 그들은 나름의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인터뷰를 했다. 대답은 사람들마다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장애인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억압된 환경에서라면 누구나 갖게 되는 감정들이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매체에서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던데.
-전북 김제시 ‘기독교 영광의 집’에서 벌어졌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전주 KBS와 전북 장애인 시설인권연대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장애인성폭력과 보조금 횡령에 대해 2년여 간의 조사를 했고 TV프로그램으로도 제작된 적이 있다. 전주 KBS의 담당 피디를 통해 자료를 받아 그곳에서 벌어진 일들을 접하게 됐다. <숨>에서 수희의 모델인 성폭력 피해 여성의 경우 어려서부터 시설 운영자인 목사의 성폭력이 있었고 증거인멸을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았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일상과 감정을 보여주고 싶었고 실화와 같은 사건으로 영화가 전개될 경우 커다란 사건과 그로 인한 극적 클라이맥스는 오히려 영화의 주제를 흐리게 할 수 있어 실화에서 시각적으로 자극적일 수 있는 사건들은 배제하고 이야기를 구성했다.
▲영화의 제목인 <숨>의 의미는 무엇인가.
-처음에는 영어 제목으로 지어졌다. 자유의지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나 자료를 찾아보던 중 elbowroom이란 단어를 봤다. [1. (팔꿈치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여지, 여유, 충분한 활동 범위 2. 기회; (행동•사고의) 자유] 수희에게 민수라는 존재 그리고 민수와 함께 가는 창고라는 공간이 제한된 환경에서 취할 수 있는 수희의 여유이자 자유이기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마땅히 한글 제목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제작자 김건 대표와 각색하신 전병원 작가 두 분의 의견으로 일단 <숨>으로 제목은 정했지만 심오한 뜻을 내포한 한 글자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았다. 직접적인 제목을 원했지만 시나리오가 나오고 제작이 진행되면서도 다른 아이디어가 없었고 스태프들은 이 영화를 <숨>으로 부르게 됐다. 그렇게 촬영날은 오고 첫 날, 첫 장면의 준비를 마치고 모니터 앞에 앉아있는데 동시녹음 기사님이 헤드폰을 건네줘 소리를 들어보니 배우 박지원씨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장애가 있어 호흡이 거친 박지원씨의 숨소리는 극중 수희의 감정에 따라 변한다. 숨소리만으로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있었다. 그 소리가 좋아서 제목을 <숨>으로 결정했다.
▲여배우 박지원양은 실제 장애인이다.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의도된 캐스팅인지.
-원래는 첫 장편영화를 만드는 것이니 전문연기자랑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의 성격상 시나리오에 기재할 수 없을 정도의 섬세한 몸짓이 중요했기 때문에 연기 지도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정도로 생각했고 연기 선생님으로 찾은 사람이 박지원씨였다. 박지원씨는 당시 대학생이었고 제가 수업 나가던 장애인 단체에서 여성장애인 인권활동가로 저와는 수업을 오가며 몇 번 마주치는 정도였다. 그렇게 박지원씨와 마주앉아 연기지도를 해달라고 제안을 하려는데 아무 근거 없이 이 사람이 연기를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덜컥 주인공을 해달라고 제안을 했는데 말을 하고는 바로 후회했다.
OK 하면 어쩌나 싶어 다니던 대학도 휴학을 해야 하고 머리도 자르고 노출 장면이 있어 옷을 벗어야 한다고 겁을 줬다. 다행히 박지원씨는 주인공은 못하겠고 연기지도는 할 수 있다고 얘기를 마치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는 5분쯤 지나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와 ‘나 할래’ 그러더라.그 모습이 내가 상상하던 영화 후반부의 수희 모습과 닮아 있었고 결국 박지원씨를 주인공으로 결정했다.
▲영화 속, 직업 배우들과 장애인 배우들이 함께 등장한다. 기억에 남은 에피소드는.
-장애인 배우들에게는 지금 극중 상황에 대한 설명만 있었을 뿐 연기지도를 할 필요는 없었다. 같은 감정이라도 몸으로 표현되는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다르기 때문에 극중 감정이 기쁨일 때 연기한 사람이 기쁨을 표현했다면 OK였다. 오히려 전문 배우들과의 작업이 힘들었다. <말아톤>의 초원이 같은 장르영화적인 연기는 자연스러운 장애인 연기자와 나란히 있으니 두 편의 영화를 동시에 보는 느낌이었다.
전문 배우들과 장애인 배우들이 촬영 3일 전부터 촬영장에서 합숙에 들어갔고 실제 시설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장애인 배우들은 밤마다 소주 마시며 옛날 얘기 해주듯이 전문 배우들에게 장애인 시설의 이야기를 해주고 동작 하나하나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촬영했다.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는데 연출의도가 있었나.
-정확히 표현하자면 다큐멘터리적인 연출은 아니다. 영화적으로 수식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 하자는 것이 의도였다. 처음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도 전달의 목적이었다. 이 영화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에 카메라를 두고 현실에서는 크게 관심 두지 않고 편견으로만 대하던 한 여성 장애인을 끈질기게 쫓아가며 관찰하는 영화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영화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숨>이란 영화로 전달하고 싶었다.
▲촬영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로케이션, 캐스팅, 전주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 등. 힘들었던 점은.
-우선, 촬영보다 박지원씨와 함께 한 준비 과정이 기억에 남는다. 캐스팅 이전에 주요 촬영장소인 장애인 시설로 사용될 공간이 먼저 정해졌다. 시나리오는 가이드라인일 뿐 실제 지원씨의 행동을 봐야지만 만들어질 영화를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어서 촬영 3개월 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지원씨 그리고 몇 명의 스태프들은 1주일에 한 번씩 1박2일에서 2박3일씩 촬영장에서 먹고 자고 얘기하고 놀면서 3개월을 지냈다. 시나리오대로 움직여보고 촬영도 해보면서 서서히 영화는 구체적으로 만들어졌고 지원씨가 점점 수희랑 가까워졌다.
앞에서 저예산이라고 엄살은 부렸지만 <숨> 이전엔 백 만원, 이백 만원을 모아서 단편 작업을 해왔던터라 감독으로서는 가장 편한 작업이었다. 예전엔 혼자 돈 구하러 다니고 식당 예약까지 하고 스태프가 모자라면 촬영, 조명까지 했었지만 처음으로 프로듀서가 있었고 전문 스태프들과 작업했다. 촬영 현장에서 모니터 앞에 앉아 화면을 본 첫 경험이었다. 첫 촬영하던 날 모니터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이 나오는데 마치 집에서 편하게 영화 한 편 보는 느낌이었다.
편하게 작업한 반면 저예산으로 제작해야 했던 프로듀서와 스태프들은 고생 많이했다.몇 명 되지 않는 연출팀과 제작부가 건물의 복도 청소부터 곰팡이 핀 벽지를 새로 도배하고 스태프들이 덮고 잘 이불빨래에 공용 샤워실 수도꼭지 교체에 화장실 수리까지 했다. 그렇게 고생해서 숙소를 정비했지만 허름한 여관보다 못한 시설이었고 한 방에서 10명 이 넘는 인원이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절대로 만족할 수 없는 환경을 잘 참아주셔서 정말 고맙다는 말밖에...
함경록 감독 |
◇감독 함경록=1978년생. 우석대학교 영화과 졸업. 대학 재학 시절부터 다수의 단편과 다큐멘터리 등을 꾸준하게 작업해왔다. 영화 <숨>은 그의 장편 극영화 데뷔작으로 전북영화제작 인큐베이션의 제작지원을 통해 만들어졌다.
◇Filmography
2010년 극영화 <숨> 89min 연출
2009년 다큐멘터리 <노송천 복원 프로젝트> 동영상 기록팀 디렉터
극영화 인권영화 프로젝트 <오버 더 레인보우> 60min 프로듀서
2008년 극영화 <신기루> 10min 제작
극영화 <푸른 바다 위의 파도> 15min 제작
2007년 극영화 <미필적 고의> 20min 각본, 연출
실험영화 <fly> 5min 연출, 제작
실험영화 <그녀는> 15min 연출, 제작
2006년 극영화 <장마> 15min 각본, 연출, 촬영
2005년 극영화 <가수 요제피나 혹은 쥐의 일족> 15min 각본, 연출
극영화 <이브는 에덴의 밖에서 행복했다> 20min 각본, 연출, 촬영
2004년 다큐멘터리 <매동마을 15일간의 기록> 30min 제작, 연출
2003년 극영화 <에덴의 지하실> 29min 각본, 연출, 촬영
2002년 극영화 <Love Story> 15min 각본, 연출
다큐멘터리 <한국인과 보신탕>
1997년 극영화 <주머니 속에> 15min 각본, 연출, 촬영